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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10개 만든다고 대학이 살아날까? 예산 투입보다 시급한 지적 기강의 재건

by pragma 2026. 5. 4.

단순히 돈을 퍼부어서 사회 문제가 해결된다면 미국은 전 세계가 따라올 수 없는 무결점의 독보적인 국가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GDP 대비 R&D 집약도가 이스라엘과 함께 세계 1~2위를 다투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투자의 결실로 노벨 과학상, 아벨상, 울프상, 카블리상, 래스커상 등을 수상한 한국인 과학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없다. 단 한 명도 없다. 오해가 없도록 하자면 한국 대학이 키워내 한국 대학 시스템의 일원으로서 받은 사례를 말하는 것이다. 아, 필즈상의 허준이 교수. 그러나 이분의 업적은 프린스턴과 미시간의 연구실에서 나온 게 아닌가?

 

정부가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거점 국립대 3곳을 선정해 5년간 매년 1,000억 원씩 지원하겠다고 한다. 5,000억 원이라는 숫자가 언뜻 커 보일지 모르나, 서울대 1년 예산이 1조 원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지원금은 서울대 예산의 10% 정도를 얹어주는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OECD의 2025년 교육지표에 따르면, 한국의 고등교육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1만 4,695달러로 OECD 평균 2만 1,444달러의 68.6% 수준에 그친다. 고등교육에 대한 정부 재원 비율은 GDP 대비 0.6%로, OECD 평균 0.9%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거점 국립대에 1,000억을 더 얹는다고 이 구조적 결핍이 메워지지 않는다.

 

숫자는 드라이하다. 학생들에게 투자는 투자대로 안되고, 아웃풋은 아웃풋대로 안 나온다. 이번 정책은 무언가 다른 게 있을까?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대학이라는 건물의 뼈대를 건들지 않고 외장재만 바꾸려는 '포인트 솔루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럽 얘기는 그만

진정한 혁신은 기존 체계의 일부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치 사슬 전체를 재설계하는 '시스템 솔루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대학의 운영 체제와 한국 고등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시스템을 통째로 갈아엎지 않는 한 예산 증액이 실효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특히 정책의 모델로 참고되는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는 현장을 모르는 과거의 망령에 가깝다. 90년대 유학파 교수들의 기억 속에 멈춰있는 파리 대학의 평준화 모델은 이미 현지에서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2017년 기준으로 프랑스의 대학들은 THE 세계대학순위 50위권에 단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국제 무대에서의 낮은 가시성을 위기로 인식한 프랑스는 그간의 평준화 철학을 뒤집는 대수술을 단행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ESCPI 등 엘리트 그랑제꼴들이 2010년 뭉쳐 PSL(파리 인문과학 대학)을 출범시켰고, 이 통합체는 2018년 THE 순위에 처음 등장하자마자 세계 72위에 진입한 뒤 이듬해 곧바로 50위권에 안착했다. 2026년 QS 기준으로 PSL은 세계 28위다. 파리 남쪽에서는 파리-쉬드 대학이 CentraleSupélec, AgroParisTech, ENS 파리-사클레 등 4개 그랑제꼴을 끌어안아 2019년 파리-사클레 대학으로 재탄생했으며, 이 통합체는 ARWU 랭킹에서 수학 부문 세계 1위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소르본 역시 구(舊) 파리 6대학(Université Pierre et Marie Curie)과 파리 4대학을 통합해 하나의 지붕 아래로 모았다. 이들이 평준화 모델을 버리고 그랑제꼴의 엘리트주의 프로그램을 대학 안으로 끌어들이는 실상은 정책 설계자의 입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게다가 유럽 모델의 핵심은 학비 무료와 절대평가 입시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엄격한 학사관리와 퇴출 기제에 있다. 교육이 무료(에 가깝지만)로 제공되는 만큼, 공부하지 않는 학생을 가차 없이 내보내는 것이다. 프랑스 학사 1년차의 유급률은 보통 40에서 60퍼센트 사이이다. 여기서 유급을 두 번 더 당하면 그대로 제적이다. 독일 대학의 학사 중단율은 전공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평균 30~40%에 육박한다. 특히 학과에서 세 번 낙제하면 독일 내 모든 대학의 해당 전공 혹은 유사 전공으로의 재입학이 영구적으로 금지되는 제도가 시스템을 지탱한다.

 

정부가 모델로 삼는 독일식 거점 대학들은 결코 예산 증액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국가가 교육비를 부담하는 대신, 학문의 질을 떨어뜨리는 학생을 걸러내는 강력한 퇴출 기제가 작동하고 있기에 가능한 모델이다. 독일의 엑셀런스 스트래티지(Excellence Strategy)가 성공한 이유는 하이델베르크나 뮌헨 공대 같은 대학들이 이 엄격한 검증 시스템을 통해 끊임없이 인적 쇄신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엄정함을 외면한 채, 독일 대학들이 평준화되어 있으니 우리도 돈만 주면 서울대를 여러 개 만들 수 있다는 발상은 현장의 메커니즘을 완전히 오독한 결과다.


도덕적 파산

대학이 생산하는 지식은 사회의 의사결정을 돕는 일종의 예측치와 같다. 그런데 그 예측의 토대가 되는 연구 결과가 표절과 조작으로 오염되어 있다면 그 대학은 공동체의 신뢰를 갉아먹는 독극물 생산 공장이나 다름없다.

 

불행히도 한국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연구 부정이 만연한 나라다. 수치가 이를 증명한다. AI 기반 표절 검사 서비스 카피킬러가 전국 4년제 대학 94%의 2022년 과제물 약 900만 건을 분석한 결과, 평균 표절률은 37.45%였다. 과제의 절반 이상을 표절한 경우가 32.92%, 90% 이상 표절한 경우도 11.84%에 달했다. 이것이 학부생 과제 이야기라 치더라도, 연구자를 양성하는 출발선이 이 상태라면 대학원 논문의 질에 대한 신뢰는 어디서 만들 것인가.

 

더 심각한 것은 적발 이후다. 한국연구재단의 2023년 대학 연구윤리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부정행위 최종 판정 47건 가운데 '조치 없음' 8건과 '조치 불가' 5건을 합치면 전체 판정 건수의 4분의 1이 사실상 면책으로 귀결되었다. 징계시효가 지났거나 이직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한 것이다. 국내 최고 지성의 전당이라 자부하는 서울대에서는 AI 분야 최고 학술대회인 CVPR에 제출된 논문이 UC버클리, 토론토대, KAIST 등 10여 개 논문을 짜깁기한 것으로 드러났고, 저자들이 직접 표절을 인정하면서 CVPR이 게재 허가를 철회했다. 가장 정교해야 할 지식 생산의 정점에서조차 '복사해서 붙여넣기'가 횡행한다면, 그 시스템이 생산하는 모든 예측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분식회계

대학 랭킹이라는 화려한 성적표 역시 그 실상은 소음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라 공식 조사를 받는 현재진행형 스캔들이다. KAIST는 2024년 11월 해외 교수 300여 명에게 "설문조사를 완료하면 100달러 상당의 상품권을 제공하겠다"는 이메일을 발송했다가 메일을 받은 해외 교수들이 QS에 제보하면서 국제적 망신을 샀다. QS는 자체 조사 후 KAIST를 2026년 평가에서 1년간 제외하는 징계를 내렸다. 연세대와 고려대는 강의도 하지 않고 국내에 체류하지도 않는 해외 연구자를 객원·특임 교수로 대거 명부에 올려두는 이른바 '학술 용병' 방식을 동원한 사실이 드러났다. 고려대의 THE 세계대학 순위는 이 방식을 본격화한 이후 2024년 201~250위에서 2026년 156위로 수직 상승했다. 교육부는 최근 QS 400위 안에 드는 국내 대학 10여 곳에 외국 교원 증빙 자료 제출을 요구하며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2026년 QS 세계대학순위에서 서울대는 38위, 연세대는 50위를 기록했다. 그 주변 어딘가에 교토대학이 있다. 그런데 교토대학은 작년에만 이미 두 명에, 2010년대에도 세 명을 비롯해 거의 스무 명 남짓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이다. 노벨상 뿐만 아니라 의학 분야에 권위있기로 정평이 난 래스커상 수상자 이름도 나란히 올라 있다. 반면 한국 대학들이 노벨 과학상, 아벨상, 울프상, 래스커상 수상자로 배출한 과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비유하자면, 매출이 빈약한 기업이 매출이 탄탄한 기업보다 시가총액이 더 높은 것이 지금 한국의 대학 랭킹이다. 주관적 설문이 총점의 45%를 차지하는 QS 방식에서는, 유령 교원을 100명 채우고 설문 참여에 100달러를 얹으면 교토대학에 버금가는 숫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은 마케팅의 승리이지 학문의 승리가 아니다.


글로벌은 개뿔

무늬만 '글로벌'인 행정 체계도 문제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서울대 전임 교원 중 한국계가 아닌 외국인 교수 비율은 2%에 불과하다. 서울경제신문이 2025년 서울대 외국인 교수 4명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한결같이 "장기 체류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거 문제부터 벽이다. 교수 아파트는 최장 7년짜리 임시 거처이고, 외국인은 전세 대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피셔 교수는 "한국에서 동등하게 존중받고 싶지만 2등 시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연구 행정은 더 심각하다.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연구사업통합지원시스템은 연구비 집행부터 단계결과보고서까지 모든 정보를 한국어로만 입력받는다. 2025년 서울대 행정혁신포럼에서 외국인 교수는 "국제교류를 위한 행정지원이 극히 미미하다"고 직접 지적했다. 인재 유치 의지는 있지만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언어 환경은 전무한 셈이다.

 

2024년 7월 OECD 한국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졸업 후 한국에 남고 싶어 한 외국인 유학생의 41%와 달리 실제 정규직으로 취업한 비율은 5.8% 미만에 불과하다. 잔류 의향의 7분의 1도 현실화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안으로부터도 인재가 빠져나간다. 스탠퍼드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AI 인재 순유입은 인구 1만 명당 마이너스 0.36명으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며, 서울대조차 2025학년도 전기 이공계 대학원 모집에서 75%가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글로벌 인재를 끌어들일 수 없는 대학이 세계 30~4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숫자 자체가 코미디지 않은가?


결국 시스템을 재설계하는 유일한 길은 도덕적 코마 상태에 빠진 대학 사회에 가혹한 룰을 도입하는 것이다. 연구 부정 적발 시 소급 적용을 포함한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하여 부패한 교수들을 도려내는 대대적인 물갈이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자교 출신 임용과 국내 박사 임용에 쿼터를 둠으로써 인적 구성을 개방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북미와 서유럽, 일본 대학의 아웃풋은 상당수가 자국 박사들이 이뤄낸 성과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미국 유학파에만 의존할 셈인가?

 

낡은 서버의 CPU가 타버렸는데 접속 주소만 10개로 늘린다고 처리 속도가 빨라질 리 없다. 혈세를 뿌리기 전에 대학이라는 시스템의 보상 구조와 윤리적 인프라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그러려면 비대한 교육부에서 고등교육 거버넌스만 따로 감독/관리하는 장관급 부서의 신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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