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들이 철학자/역사학자들의 어설픈 글쓰기에 대한 경고였다면, 오늘은 균형을 위해 과학계도 살짝 다뤄볼까 한다. 데이터와 명료함으로 승부하는 과학자들은 하라리 같은 공상소설을 뻔뻔하게 내놓지는 않지만, 다른 유형의 실수를 범한다. 바로 환원주의다. 그 대표적인 예시인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Consilience)』을 파헤쳐 보자.
오해는 없길 바란다. 이 비판은 윌슨이 진화생물학에서 쌓은 불멸의 업적이나 지적 성실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윌슨은 인문학 코너를 점령한 함량 미달의 저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격'을 가진 학자다. 그의 문장은 유려하며 생태계의 복잡성을 포착하는 시선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통섭』은 지적으로 매우 강력하고 매혹적인 책이기에, 우리는 그가 펼치는 환원주의적 기획의 위험성을 더욱 예민하게 검역해야 한다.
그의 실수는 데이터의 부족이 아니라 과잉에 있다. 자신이 가진 강력한 도구인 생물학으로 인간사의 모든 층위를 재단할 수 있다고 믿은 오만이다. 윌슨이 제시하는 자연과학과 사회의 연결고리는 분명 지적 자극을 주지만, 그 종착역이 생물학으로의 종속으로 흐를 때 우리는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윌슨을 읽는 즐거움은 만끽하되, 환원주의라는 양날의 검에 사회과학의 주권을 내어주지는 말자는 것이 나의 핵심 요지다.
이 시리즈 글이 다 그렇듯 주인장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보면 2초 만에 나올 줄거리를 위해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환원주의(Reductionism)란 모든 현상을 단 하나의 원리나 하위 층위의 요소로 설명하려는 시도다. 본래 인간은 복잡한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연산 능력이 부족하다. 정보 과부하를 막기 위해 우리는 개념을 만들고 범주를 설정한다. 이러한 범주화는 효율적인 생존 본능이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현상을 아무런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갖는다. 우리 뇌는 이미 세상을 여러 서랍으로 분류해 놓았고, 모든 데이터는 무의식적으로 그 서랍의 규격에 맞춰 변형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효율적인 인지 습성이 "모든 것은 결국 ~으로 설명된다"는 환원주의적 강박으로 치달을 때 발생한다. 복잡다단한 인과관계를 하나의 마법 같은 도구로 통일하려는 욕망이다. 다원주의가 따분하고 파편화된 것처럼 보일 때, 환원주의는 모든 것을 꿰뚫는 단 하나의 진리라는 달콤한 유혹을 던진다.
가장 고전적인 예시는 물리학 환원주의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결국 원자의 움직임과 물리 법칙으로 귀결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일찍이 한계에 부딪혔다. 산소와 수소 원자의 개별 성질을 완벽히 안다고 해서 물의 성질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수조 개의 분자가 모여 파도를 만들고 표면장력을 형성하는 현상은 개별 원자 수준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창발적(Emergent) 특성이기 때문이다.
생물학 환원주의 역시 비슷한 함정에 빠져 있다. 세포의 대사 과정을 나열한다고 해서 인간이 희로애락을 느끼고 문명을 건설하는 원리를 도출할 수는 없다. 벽돌 하나를 분자 단위로 정밀하게 분석한다고 해서 그 벽돌로 지은 집의 동선이나 안락함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부분의 성질과 전체의 구조 사이에는 하위 층위의 언어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환원적 시도는 사회과학에서도 반복된다. 사회를 개인의 집합으로만 보는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나라는 표본 하나를 아무리 데이터화한들, 한국 사회의 거대 담론이나 구조적 모순을 온전히 복원해낼 수는 없다. 나를 통과하는 사회적 압력은 개인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스템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환원주의의 가장 거대하고 처절한 기획을 찾으라면 20세기 초 버트런드 러셀과 그를 이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러셀은 『수학 원리』를 통해 수학의 모든 공리를 논리학이라는 더 근본적인 층위로 환원하려 했다. 그의 논리적 원자론은 일상 언어의 모호함을 걷어내고 세계를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논리적 원자로 분해하면 세계의 구조를 완벽히 기술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이 야심은 1931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산산조각 난다. 아무리 강력한 논리 체계라도 그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공리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 수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러셀의 바통을 이어받은 오스트리아 빈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더욱 극단적인 통합 과학(Unified Science)을 꿈꿨다. 이들은 모든 의미 있는 지식은 감각 경험을 통해 검증 가능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물리학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은 의미가 결여된 헛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서슬 퍼런 검증 원리는 곧 자기모순에 빠진다. 정작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지식은 무의미하다"는 그 선언 자체를 경험으로 검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은 바로 이 실패한 환원주의 계보를 잇는 세련된 변종이다. 창의적 연결이라는 수사로 포장했으나, 실상은 모든 학문을 생물학이라는 단일 문법으로 강제 통합하려는 시도다. 특히 마음과 문화, 사회과학을 다룬 6, 7, 9장의 서술은 지독하게 껄끄럽다. 윌슨은 마음과 의식, 자유의지를 뇌 속 신경 세포들의 상호작용이 빚어낸 시뮬레이션 결과물로 단정 짓는다. 즉 인간의 고결한 결단이 신경 세포끼리의 연산,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계적 인간관은 7장에서 유전자가 문화를 짧은 끈으로 붙잡고 있다는 비유로 확장된다. 윌슨에 따르면 인간의 문화적 행동조차 유인원 시절부터 내려온 생물학적 본능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후성 규칙이라는 가이드라인이 우리 뇌의 사고 방향을 미리 정해두었다는 논리는, 찬란한 인류 문명을 생물학적 설계도 안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 급기야 9장에서는 사회학자들이 생물학을 몰라 공부를 안 한다며 비하하는데, 이는 통섭이라는 제목이 무색할 만큼 오만한 태도다.
이 비판이 외부자의 불만이 아니라는 점은 생물학 내부에서 먼저 제기됐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은 1979년 논문 「산 마르코 대성당의 스팬드럴과 팡글로스 패러다임」에서 윌슨의 환원주의를 직접 겨냥했다. 이들은 유기체를 개별 형질로 쪼개어 각각에 적응 이야기를 붙이는 방식을 "팡글로스식 패러다임"이라 불렀다. 스팬드럴, 즉 아치와 아치 사이에 생기는 삼각형 공간이 설계된 것이 아니라 돔을 얹기 위한 구조적 필연의 부산물인 것처럼, 유기체의 많은 특성 역시 적응의 결과가 아니라 발생과 구조적 제약의 산물이라는 논지다. 진화생물학 내부에서 나온 이 비판은 윌슨식 생물학 환원주의에 대한 동료 심사나 다름없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윌슨의 논리는 치명적인 맹점을 드러낸다. 우선 그는 층위의 창발성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룰 때 발생하는 현상은 개별 구성원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 인과율을 가진다. 자살률의 변동이나 계급 고착화는 뇌를 뜯어보거나 유전자 서열을 해독한다고 해서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사회 구조적 압력이 만들어낸 고유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화가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었다는 주장은 특정 문화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다-특히 서구 문명이 생존에 가장 유리하게 짜였으니 우월하다는 식의 프로파간다. 이것이 공상이 아니라는 점은 역사가 증명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환원 적용한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이 정확히 이 경로를 밟았고, 20세기가 그 결말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실재하는 인간은 유전자에 마냥 복종하지 않는다. 때로는 생존과 정반대되는 종교적 순교나 이념적 투쟁에 기꺼이 목숨을 던지며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선다.
결국 윌슨의 논리대로라면 이러한 자발적 희생이나 광신적 행위는 그저 유전자가 제 기능을 못 한 찌꺼기나 오작동일 뿐이다. 유전자가 단백질 만드는 법은 알지언정, 죽음을 무릅쓰는 숭고함이나 시대적 비극이 어떻게 생존 본능을 압도하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하위 층위의 부품 분석에 매몰되어 거대한 사회적 힘과 역사적 우연을 보지 못하는 윌슨의 통섭은 통합이 아니라 무례한 삭제다.
주인장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는 학자는 오토 노이라트와 낸시 카트라이트다.
노이라트는 지식의 체계를 끝없는 망망대해 위를 떠다니는 배(Neurath's Boat)에 비유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배를 수리하기 위해 안전한 육지의 도크로 돌아갈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발밑의 낡은 판자를 하나씩 뜯어내어 새로운 판자로 갈아 끼우며 항해를 이어가야 한다.
윌슨은 생물학이라는 가장 단단한 판자 하나로 배 전체를 다시 짜 맞추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듯하다. 하지만 노이라트가 간파했듯, 지식의 체계는 어느 한 지점의 말뚝에 의지해 지은 집이 아니다. 우리가 당면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사회학이라는 판자가, 때로는 경제학이라는 판자가 그 자리를 버텨주어야 한다. 특정 판자가 약하다고 해서 다른 판자들을 모두 뜯어내는 순간, 배는 물이 차서 침몰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마법 공식이 아니라, 거친 바다 위에서 각기 다른 규격의 판자들을 어떻게 적절히 이어 붙여 항해를 지속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지혜다.
또한 낸시 카트라이트가 주장하듯, 우리가 마주한 실재는 단 하나의 보편 법칙으로 지배되는 매끈한 공간이 아니다. 각기 다른 층위의 법칙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얼룩덜룩한 세계(The Dappled World)다. 요지인즉, 소득 불평등은 경제/사회학의 언어로, 뇌의 반응은 인지과학의 언어로, 원자의 결합은 물리학의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경제 구조를 논할 때 뉴턴의 운동법칙을 가져오지 않는 이유는 각 층위마다 현상을 지배하는 인과의 언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용어로 치장해도, 하위 층위의 법칙으로 상위 층위의 맥락을 집어삼키려는 시도는 결국 현상의 본질을 놓치는 Nonsense로 귀결될 뿐이다.
c.f. 사실 과학자들의 글도 가독성 대중성 갖춘 수작이 여럿 있다. 다른 분야를 넘나들면서도 겸손을 갖춘 학자들이 쓴 글은 문체도 담백하여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대표적으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물리학과 철학>, 에르빈 슈뢰딩어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칼 세이건의 저서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 분야의 언어로 자기 분야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것이다. 월권하지 않는 것이 학자의 미덕임을 몸소 보여준 사례들이다.
직간접적으로 언급된 저서
단행본
Wilson, Edward O.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New York: Vintage Books, 1999.
Neurath, Otto. Empiricism and Sociology. Edited by Marie Neurath and Robert S. Cohen. Dordrecht: D. Reidel, 1973, p 92.
Cartwright, Nancy. The Dappled World: A Study of the Boundaries of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Heisenberg, Werner. Physics and Philosophy: The Revolution in Modern Science. London: Penguin Modern Classics, 2000.
Schrödinger, Erwin. What Is Lif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Einstein, Albert. Relativity: The Special and the General Theory. 100th Anniversary Edit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Sagan, Carl. Cosmos. New York: Random House, 1980.
———. Pale Blue Dot: A Vision of the Human Future in Space. New York: Random House, 1994.
———. The Demon-Haunted World: Science as a Candle in the Dark. New York: Random House, 1996.
논문
Gould, Stephen Jay, and Richard C. Lewontin. "The Spandrels of San Marco and the Panglossian Paradigm: A Critique of the Adaptationist Programm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ies B 205, no. 1161 (1979): 58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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