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한국에서 바슐라르는 주로 『불의 정신분석』(1938)이나 물질적 상상력에 관한 저서들, 즉 그의 저작 중 가장 비(非)인식론적인 작품들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에서 프랑스 철학이 소비되는 풍토 - 바디우, 사르트르, 들뢰즈, 푸코 등의 언급도가 압도적이다 - 를 고려하면,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존재감이 미미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인식론이 거론될 때조차 그것은 거의 항상 과학적 '불연속성'(과학이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 몇 차례의 단절이 있다는 의미)의 틀 안에서이며, 대부분 쿤과 병행하여 다루어질 뿐이다. 이러한 구도는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불충분하다.

실재로 둘은 실증주의적 연속성을 거부한다는 점을 공유하며, 이러한 표면적인 수렴이 두 사람을 결합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프랑스 분석철학자 아나스타시오스 브레너(Anastasios Brenner)는 이들 사이에 이해의 불일치가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Brenner, 2006, p. 117). 오직 해킹만이 프랑스 학파의 역사적 도구들을 북미 학파의 분석적 기법들과 결합함으로써 이 불일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는 물론 매우 엄밀하고 고된 작업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ibid., p. 124).
따라서 쿤이라는 렌즈를 무턱대고 바슐라르에게 들이미는 것은 두 전통 사이의 역사적, 방법론적 차이를 건너뛰는 일이며, 결국 바슐라르 철학의 독창성을 놓치는 일이다. 그 독창성이란 패러다임이라는 사회학적 접근이 아니라, 더 정밀한객관성으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타파해야 하는 사고의 임계, 즉 지적 관성으로부터의 저항(obstacle)을 파헤치는 정신분석 그 자체에 있다.
1. 바슐라르의 문제의식
이 글은 바슐라르의 대표작인 <과학적 정신의 형성: 객관적 지식의 정신분석에 대한 기여 // 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 Contribution à une psychanalyse de la connaissance objective>를 읽기 위한 가이드를 지향한다.
부제목을 잠시 멈춰 서서 고찰해 볼 가치가 있다. 흔히 생략되고는 하지만, 바슐라르의 인식론을 말해주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향하는 바는 단순한 과학사도, 과학적 발견의 논리도 아닌 '정신분석'이다. 이 단어는 결코 수사학적 은유가 아니다. 바슐라르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에서 기본 도식 - 필요한 교정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저항 - 을 차용하여 이를 객관적 지식에 적용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이론의 타당성 검증과 명제 간의 논리적 구조에만 몰두하던 논리 실증주의 계통의 인식론이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던진다. 왜 정신은 지식에 저항하는가? 왜 오류는 그토록 안정적이고 끈질기며, 무한히 합리화될 수 있는가?
바슐라르의 답은 단호하다. 과학적 인식을 가로막는 저항(obstacle)은 세상의 복잡함이나 인간 감각의 불완전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 그 자체로부터 발생한다. 지적 습관, 무의식적인 가치 투사, 속성을 실체화하려는 경향, 물질에 생명력을 부여하거나 현상을 성적으로 해석하려는 무의식적 본능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식론이 단순히 이론을 분석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진정한 인식론은 그 이론을 생산하는 정신 내부의 역학을 분석해야만 한다.
인식론과 정신분석, 과학철학, 그리고 인식 주체에 대한 철학을 결합한 이러한 파격적인 시도는 『과학적 정신의 형성』에 20세기 과학철학사에서 독보적이고 근본적인 특이성을 부여한다.
2.'인식론적 저항'이란?
인식론적 저항 또는 단절(obstacle ou rupture épistémologique)에 대한 정의는 제 1장에서 주어지는데, 의역 없이 직접 인용할 가치가 있을 만큼 깔끔하다. (국내에는 인식론적 장애라고 번역된 모양인데, 장애라는 말의 뉘앙스를 감안하면 obstacle의 본의와는 거리가 있다)
과학의 진보를 위한 심리학적 조건들을 탐구하다 보면, 과학적 지식의 문제는 저항(obstacles)이라는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야 할 것은 현상의 복잡성이나 덧없음과 같은 외부적인 저항이 아니며, 인간의 감각이나 정신의 나약함을 탓할 일도 아니다. 정체와 심지어 퇴행의 원인들이 나타나는 곳, 우리가 인식론적 저항이라고 부르게 될 관성(inertie)의 원인들을 발견하게 될 곳은 바로 인식하는 행위 그 자체의 내부(dans l'acte même de connaître, intimement)이며, 일종의 기능적 필연성에 의해 나타나는 지체와 혼란 속이다.
원문: « Quand on cherche les conditions psychologiques des progrès de la science, on arrive bientôt à cette conviction que c'est en termes d'obstacles qu'il faut poser le problème de la connaissance scientifique. Et il ne s'agit pas de considérer des obstacles externes, comme la complexité et la fugacité des phénomènes, ni d'incriminer la faiblesse des sens et de l'esprit humain : c'est dans l'acte même de connaître, intimement, qu'apparaissent, par une sorte de nécessité fonctionnelle, des lenteurs et des troubles. C'est là que nous montrerons des causes de stagnation et même de régression, c'est là que nous décèlerons des causes d'inertie que nous appellerons des obstacles épistémologiques. » (Bachelard, 1934/2008, p. 16)
이 정의에 포함된 세 가지 요소는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항의 내면성
저항은 외부 세계, 즉 현상의 복잡함이나 도구의 불완전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하는 행위 그 자체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다. 이 테제는 철저히 반 경험주의적이다. 이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경험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과학적 지식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을 얻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슐라르가 날것의 경험 또는 제1경험(l'expérience première)이라 부르는 것 - 즉각적이고 구체적이며 다채로운 관찰 - 은 과학에 있어 불충분한 단계일 뿐만 아니라, 과학의 공공연한 적이다. 이로부터 2장에서 보여준 정언명령이 도출된다.
"과학적 정신은 자연에 대항하여, 우리 내면과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의 충동과 지시에 대항하여, 자연스러운 휩쓸림에 대항하여, 다채롭고 다양한 사실에 대항하여 형성되어야 한다. 과학적 정신은 스스로를 개조(se réformer)함으로써 형성된다." « L'esprit scientifique doit se former contre la Nature, contre ce qui est, en nous et hors de nous, l'impulsion et l'instruction de la Nature, contre l'entraînement naturel, contre le fait coloré et divers. L'esprit scientifique doit se former en se réformant. » (Bachelard, 1934/2008, p. 27-28)
여기서 우리는 가장 정교한 형태를 포함한 그 어떠한 경험주의와도 결을 달리하는 바슐라르만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곧, 경험이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선사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바슐라르에게 있어 우리가 사물을 보고 즉각적으로 느끼는 생생한 이미지나 그럴싸한 직관은 우리 정신을 안주하게 만드는 지적 유혹이다. 과학적 지식은 엄밀한 추상의 영역이며, 이 본능적인 확신을 거부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정으로서의 지식
저항이 외부가 아닌 정신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즉각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 바로 과학적 지식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구축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식은 언제나 이전 지식에 대한 교정이다. 바슐라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사실, 우리는 이전의 지식에 대항하여(contre) 인식한다. 잘못 형성된 지식들을 파괴하고, 정신 그 자체 내에서 정신화(spiritualisation)를 가로막는 것들을 극복함으로써 인식하는 것이다 // En fait, on connaît contre une connaissance antérieure, en détruisant des connaissances mal faites, en surmontant ce qui, dans l'esprit même, fait obstacle à la spiritualisation." (Bachelard, 1934/2008, p. 17)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에 대항하여(contre)이다. 이 단어는 지식이 순진한 의미에서 누적적인 성격을 띠지 않음을 내포한다. 지식은 마치 피라미드의 벽돌 쌓듯이 이미 존재하는 지식의 층 위에 새로운 진리를 덧붙여 나가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극복하며, 바로잡는다. 요컨대 인식이란 긍정적인 행위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과거의 오류와 싸우는 논쟁적(polémique)인 행위인 것이다.
질문이 곧 출발점이다
여기서 세 번째 요소가 도출되는데, 아마도 가장 자주 인용되지만 동시에 가장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대목일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다. "그 어떤 것도 거저 주어지지 않은다. 모든 것은 구축된다 // Rien ne va de soi. Rien n'est donné. Tout est construit." (Bachelard, 1934/2008, p. 17) 이 공식은 관념론적인 것이 아니다. 즉, 실재가 정신의 환상이라거나 정신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함축된 의미는 바로 과학적 대상—전자, 전기용량, 타원 궤도 등—이 자연 상태에서 결코 단순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과학적 대상은 정밀한 문제설정(problématique)을 동반한 합리적 절차에 의해 생산(이론과 실험을 통하여)된다. 그렇기에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다. "과학적 정신에 있어 모든 지식은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질문이 없었다면 과학적 지식 또한 존재할 수 없다. // pour un esprit scientifique, toute connaissance est une réponse à une question. S'il n'y a pas eu de question, il ne peut y avoir connaissance scientifique." (ibid.) 과학은 수동적인 관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함께 시작된다.
3. 인식론적 저항의 구조
바슐라르의 사유를 피상적으로 읽을 때 간과하기 쉬운 특징은, 이 (인식론적) 저항이 고립되어 있거나 무작위적으로 흩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저항은 두 가지 갈래의 뚜렷한 구조를 가진다: 양극성(Bipolarité)과 층위(Stratification).
양극성에 관한 논의는 1장에서 일종의 심리학적 법칙으로 명시된다. " 과학 문화를 가로막는 저항들이 언제나 쌍을 이루어 나타난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는 가히 '오류의 이극성에 관한 심리학적 법칙'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어떤 난관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순간, 우리는 그 지점을 우회하더라도 결국 그와 정반대되는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 Il est d'ailleurs très remarquable que, d'une manière générale, les obstacles à la culture scientifique se présentent toujours par paires. C'est au point qu'on pourrait parler d'une loi psychologique de la bipolarité des erreurs. Dès qu'une difficulté se révèle importante, on peut être sûr qu'en la tournant, on butera sur un obstacle opposé." (Bachelard, 1934/2008, p. 24)
소박한 경험주의를 피하려다가 성급한 체계화의 함정에 빠지며, 공허한 일반화를 경계하는 정신은 다채로운 디테일에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양극성은 단순한 심리학적인 우연이 아니다. 바슐라르는 이를 과학적 사유가 지닌 논쟁적인 절차의 구조 자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대항하여 사유하며, 이러한 부정(négation)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와 대칭적인 위험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예시를 들면, 나는 감각을 믿지 않겠다고 부정하는 순간,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오직 논리적 체계만이 진리라는 교조적 신념에 매몰되는 식이다.
층위(Stratification)는 훨씬 더 복잡한 개념이며, 바슐라르 저서의 뼈대가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다룬 인식론적 저항에 비해서는 중요도가 덜하기에, 책의 구성이 이러하다는 식으로 훑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제2장에서 제11장까지의 내용은, 언뜻 보면 역사적 사례들을 무작위로 나열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장들은 가장 표면적인 저항에서 가장 깊숙한 저항으로, 즉 가장 의식적인 것에서 가장 무의식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일정한 위계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이를 크게 두 개의 층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층위(제2장~제5장)는 이른바 '표층적 저항'들이다. 제1경험(2장), 일반적 지식(3장), 언어적 저항(4장), 실용적 통일성(5장)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들은 정신이 무언가를 관찰하거나 일반화하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믿는 과정에서 생산하는 저항들이다. 이 단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고전적인 인식론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두 번째 층위(제6장~제10장)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 층위는 인식 주체의 심리학적 무의식을 건드린다. 실체론(6장), 본능으로서의 실재론(7장), 생기론(8장), 소화의 신화(9장), 인식 안의 리비도(10장)가 그것이다. 여기서 인식을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지적인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정서적 무의식, 즉 실체에 대한 무의식적 가치 부여, 현상의 성(性)적 해석, 실재를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이 과정은 말 그대로 물질적 소유욕에서 성적 충동으로 이어지며, 인식하는 정신의 심층부로 내려가는 진정한 의미의 '프로이트적 하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11장에서 다루는 수량적 지식의 저항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질적 가치 부여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수학의 영역조차 저항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불필요한 수치적 정밀함, 무시할 수 있는 것을 무시하지 못하는 태도, 특정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애착 등은 저항이 특정 지식의 종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저항은 스스로를 감시하지 않는 모든 인지적 절차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이는 단순히 우리 인식의 한계를 긋는 칸트적 성찰을 넘어, 우리 사유에 내재된 본능적 관성과 매 순간 사투를 벌이는 인식론적 정신분석에 가깝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떠오르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직관에 대항해 매 순간 스스로를 개조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4. 표층적 저항에서 심층적 저항으로
이러한 층위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하기 위해, 바슐라르가 매우 정밀하게 분석한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첫 번째 층위에서 두 번째 층위로 넘어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언어적 저항 (L'obstacle verbal)
제4장은 전형적인 표층적 저항의 사례를 잘 보여준다. 바로 '스펀지(éponge)'라는 단어가 설명의 원리로 오용되는 경우다. 바슐라르는 18세기의 일련의 문헌들을 통해, '흡수하는 스펀지'라는 단 한 마디의 단어, 즉 그 이미지가 전기나 자기 현상을 마주한 수 세대의 물리 학자들을 어떻게 마비시켰는지 증명한다. 사고를 가로막는 것은 현상의 복잡성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익숙한 이미지가 선사하는 '조급한 만족감'이다. 전(前)과학적 정신은 단지 재인식(reconnaître)했을 뿐이면서 스스로 인식(connaître)했다고 믿어버린다. 그러나 재인식하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바슐라르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코멘트를 남긴다:
"은유는 이성을 유혹한다. 그것들은 특수하고 먼 곳의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반적인 도식으로 둔갑해버린다. 따라서 객관적 지식에 대한 정신분석은 이러한 소박한 이미지들을 탈색하거나, 나아가 지워버리는 데 전념해야 한다. // Les métaphores séduisent la raison. Ce sont des images particulières et lointaines qui deviennent insensiblement des schémas généraux. Une psychanalyse de la connaissance objective doit donc s'appliquer à décolorer, sinon à effacer, ces images naïves." (Bachelard, 1934/2008, p. 90) 이 말의 참뜻인즉, 이미지나 은유는 이미 세워진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용도에 국한되어야지, 이론의 바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체론적 저항
제6장에 이르면 저항은 한 단계 더 깊은 층위로 진입한다. 이제 저항은 단일한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 범주—즉 보편적 설명 원리로 군림하는 '실체(substance)' 그 자체가 된다. 전과학적 정신은 모든 속성을 실체화하려는 경향 - 사물에게 고정된 성질을 부여하려는 본능적 경향 - 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열을 하나의 '물질'로, 전기를 '유체'로, 자기를 '방출물'로 간주해버리는 식이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경향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 실체론적 저항은 모든 인식론적 저항이 그러하듯 다형적(polymorphe)이다. 그것은 지극히 분산되어 있고 심지어는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직관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진다. 전과학적 정신은 거의 본능적인 성향에 따라, 어떤 객체가 관여하는 모든 지식을 그 객체 위에 뭉뚱그려 고착시킨다. 그 지식들이 경험적으로 어떤 위계를 갖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 L'obstacle substantialiste, comme tous les obstacles épistémologiques, est polymorphe. Il est fait de l'assemblage des intuitions les plus dispersées et même les plus opposées. Par une tendance quasi naturelle, l'esprit préscientifique bloque sur un objet toutes les connaissances où cet objet a un rôle, sans s'occuper de la hiérarchie des rôles empiriques." (Bachelard, 1934/2008, p. 112)
실체론적 저항은 고정된 형태가 없기 때문에 사유의 모든 틈새로 교묘히 침투한다. 아주 뚜렷한 하나의 증상을 통해 식별할 수 있는데, 바로 하나의 명사(실체)에 수많은 형용사를 덧붙이려 드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이를 지식을 체계적으로 구축하지 못한 채 그저 나란히 병렬적으로 나열하기만 하는 사유의 흔적이라고 보았다.
" 과학적 사유의 진보는 어떤 명사에 적합한 형용사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여나가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속성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엄밀한 위계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 Le progrès de la pensée scientifique revient à diminuer le nombre des adjectifs qui conviennent à un substantif et non point à l'augmenter. On pense scientifiquement des attributs en les hiérarchisant et non pas en les juxtaposant." (Bachelard, 1934/2008, p. 129)
실체론이 가진 또 다른 특징에 주목할 만한데, 이것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인식론적 저항으로 가는 길목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바로 질문의 샘을 말려버리는 강력한 관성이. 우리가 특정 실체에 속성이란 것을 부여하는 순간—가령 '전기 유체는 끈적거린다'거나 '생명의 소금이 신체 내밀한 곳에 거주한다'는 식으로 규정되는 순간—탐구는 거기서 멈춘다. 더 이상 찾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실체론적 답변은 새로운 실험을 유도하기는커녕 사유를 안주시킴으로써 실험을 원천 봉쇄한다.
5. 실재론자의 정신분석
제7장은 《과학 정신의 형성》이 지향하는 정신분석적 방법론이 그 필연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이다. 여기서 바슐라르가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부제에 적어 넣은 이유가 단순히 비유가 아님이 명백해진다. 이제 분석의 대상은 지적 오류를 넘어, 그 오류의 근원인 '실재론적 본능(instinct réaliste)'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세계가 우리 경험 속에 즉각적이고 충만한 실재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직접 움켜쥘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이 본능은 성찰을 거쳐 선택된 철학적 입장이 아니라, 그 어떤 이성적 검증보다 앞서 존재하는 선천적인 믿음이다.
이러한 분석은 실재론자가 물질의 속성을 응시하며 만들어내는 가상적 이미지들이 왜 "가장 흩뜨리기 어려운 것들"인지 보여준다 (Bachelard, 1934/2008, p. 169). 그것들이 논리적 증명에 저항하기 때문이 아니다. 논리는 언제든 우회할 수 있지만, 이미지들은 인간의 깊은 무의식과 정서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반박(réfuter)을 넘어, 그 정서적 뿌리를 이해해야 한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이해의 노력을 '지적 카타르시스'라 부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금이다. 바슐라르는 금에 부여된 경제적 가치가 수 세기 동안 연금술과 약학을 어떻게 오염시켰는지 보여준다. 연금술사들이 어리석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무의식 속에서 금이 가진 정서적 가치가 객관적 평가로의 전환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말루앵(Malouin)이 "금은 심장을 놀랍게 강화한다"고 주장했을 때, 바슐라르는 그 시대의 나이브함을 비웃지 않는다. 대신 그는 시대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나타나는 이 뿌리 깊은 '저항의 구조'를 진단할 뿐이다.
나아가 바슐라르는 이 저항의 사회적 차원에도 주목한다. 비싼 약이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믿는 의사와 환자의 무의식적 합의는 사회적인 자명함을 형성하고, 이는 저항을 해소하기는커녕 더욱 공고히 한다. 여기서 바슐라르와 쿤(Kuhn)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바슐라르가 묘사하는 것은 패러다임의 속에서의 결속력(개별 지식 간의 구조적인 결속력)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의 공모'다.
6. 경각(vigilance)의 인식론을 향하여
마지막 장인 제 12장은 흔히 바슐라르 논지의 요약으로 읽히고는 하지만, 철학적으로 가장 밀도가 높은 장이기도 하다. 바슐라르가 탐구를 통해 도출한 핵심 결론, 즉 인식론적 저항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란 없다는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테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책의 전체 구성으로부터 도출된다. 만약 저항이 아는 행위에 내재한다면 - 즉 학자의 무의식이 실체화와 애니미즘, 가치화된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면 - 인식론적 경각은 결코 멈출 수 없다. 모든 저항을 극복한 이성의 최종 상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지식이 구성되는 과정과 저항이 재구성되는 과정 사이의 영구적인 긴장만이 있을 뿐이다.
바슐라르는 이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표현하며, 과학적 지적 토양(culture scientifique)이 "영구적인 동원 상태에 놓여야 하며, 폐쇄적이고 정적인 지식을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지식으로 대체하고, 모든 실험적 변수를 변증법화하며, 마침내 이성에게 진화해야 할 이유들을 부여해야 한다 // en état de mobilisation permanente, remplacer le savoir fermé et statique par une connaissance ouverte et dynamique, dialectiser toutes les variables expérimentales, donner enfin à la raison des raisons d'évoluer." (Bachelard, 1934/2008, p. 22) 고 요구한다.
또한 더욱 직접적인 정신분석적 용어를 빌려, 객관성이란 단 한번에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주관적인 이미지와 실재론적 본능을 씻는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어야 을 명시한다. "객관성의 순간을 살고 또다시 사는 것, 객관화가 태동하는 상태에 끊임없이 머무는 것, 여기에는 부단한 탈주관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 Vivre et revivre l'instant d'objectivité, être sans cesse à l'état naissant de l'objectivation, cela réclame un effort constant de désubjectivation." (Bachelard, 1934/2008, p. 280)
이러한 논지는 과학사학자와 철학자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과학사학자는 아이디어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철학자는 사실을 사유의 체계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정 시대에 잘못 해석된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학자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사실로 남는다. 그러나 인식론자의 판단에 따라, 그것은 하나의 저항(obstacle)이자 반(反)사유(contre-pensée)가 된다 // 'historien des sciences doit prendre les idées comme des faits. L'épistémologue doit prendre les faits comme des idées, en les insérant dans un système de pensées. Un fait mal interprété par une époque reste un fait pour l'historien. C'est, au gré de l'épistémologue, un obstacle, c'est une contre-pensée." (Bachelard, 1934/2008, p. 21)
철학자는 점진적으로 발견된 진리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교정(rectification)의 역사—즉 극복된 오류와 해체된 저항의 역사—를 기록한다. 그의 시선은 규범적(normatif)이다. 즉, 그는 진화한 현대 이성의 현재로부터 과거를 심판한다. 이 논지는 또한 교육적인 의미를 갖는데, 인식론을 다루는 다른 철학자 중 가장 독창적인 주장일 것이다. 만약 이성이 이미 획득한 것(acquis)에 안주할 수 없고 저항이 언제나 재구성된다면, 과학 교육은 단순히 결과를 전달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교육은 반드시 교정(rectification)의 과정을 전수해야 한다.
"엄밀함은 직관에 대한 정신분석이다. [...] 직관은 결코 주어진 데이터여서는 안 되며, 언제나 하나의 예증(illustration)이어야 한다 // La rigueur comme une psychanalyse de l'intuition, [...] L'intuition ne doit jamais être une donnée. Elle doit toujours être une illustration." (Bachelard, 1934/2008, p. 267-268)
한편, 바슐라르가 정의하는 객관성은 사회적이고 담론적이다. 그것은 고독한 주체의 시선에 근거할 수 없는데, 고립된 시선이 아무리 탁월할지라도 언제나 실재에 대한 소유욕, 주관적인 가치부여, 그리고 감각적 자극에 의해 오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또다른 눈(타자)이 필요하다.
여기서 타자의 눈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육안을 빌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적 감각이 덕지덕지 붙은 '사물'을 버리고, 오직 '추상화된 형태'로서의 현상을 포착하기 위한 비인칭적 시선을 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슐라르는 이 '타자의 눈'이 가진 객관성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측정 도구라고 본다. 그리고 바슐라르는 이로부터 측정 도구의 위상에 관한 결론을 도출하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도구주의 인식론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공식일 것이다. "측정 도구는 결국 하나의 이론이다. 현미경은 눈의 연장이 아니라 정신의 연장이다 // L'instrument de mesure finit toujours par être une théorie et il faut comprendre que le microscope est un prolongement de l'esprit plutôt que de l'œil." (Bachelard, 1934/2008, p. 272)
결론: 바슐라르의 인식론인 것과 아닌 것
바슐라르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교정에는 방향성이 있다. 우리는 이전의 지식에 대항하여(contre) 알게 되지만, 동시에 경험을 더 나은 합리적 체계로 재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가 이후 저술들에서 발전시킬 '응용 합리주의'는 참여된 합리주의(rationalisme engagé)이다—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가 선집한 『인식론』에서 그는 이를 "철학적으로 참여된" 것이라 부른다. 이는 이성이 연구 대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서서, 차례로 교체되는 패러다임들을 마치 구경꾼처럼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성은 언제나 자신이 도달한 현재의 진리 위에 딛고 서서, 그 엄격한 기준을 잣대 삼아 과거의 오류를 심판하고 교정하며 전진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슐라르는 쿤의 상대주의(어디까지나 <구조>에서 제기된 공약불가능성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쿤은 생애 후반부 본인이 상대주의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나 구조주의보다는 비판적 실용주의에 더 가깝다.
또한 바슐라르는 과학사학자가 아니다. 그가 주로 17~18세기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은 철저히 규범적(normatif)이다. 그는 위대한 저자들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저자들을, 창조적인 텍스트뿐만 아니라 전(前)과학적인 텍스트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이는 저항(obstacle)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그것이 뛰어난 정신들조차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에게 역사는 충실한 복원을 위한 아카이브가 아니라, 인식에 대한 정신분석을 수행하는 실험실로 기능한다.
반면, 바슐라르가 지향하는 진정한 정체성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긴장(tension irréductible)의 철학자이다. 저항(obstacle)과 교정(rectification) 사이의 긴장, 가치를 부여하려는 무의식과 그 감정적 색채를 탈색하려는(décolore) 이성 사이의 긴장, 그리고 매혹하는 이미지와 우리를 해방시키는 추상 사이의 긴장—이러한 긴장은 결코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하고, 유지하며, 감시해야(se surveille) 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인식론을 하나의 지적 윤리(éthique intellectuelle)로 간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뇌에 대항하여 생각해야 한다 // Il faut penser contre le cerveau." (Bachelard, 1934/2008, p. 282)
『과학적 정신의 형성』에 등장하는 일련의 도발적인 공식들을 매듭짓는 이 문구는 바슐라르적 기획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공식은 과학적 지식이 우리 인지 능력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아니라, 그 능력의 근본적인 개혁(réforme)임을 선언한다. 또한 과학적 정신은 결코 타고난(doué) 정신이 아니라, 철저히 훈련된(discipliné) 정신—자기 자신에 대항하고, 자신의 본능적 경향에 대항하며, 자신이 즐겨 찾는 이미지들에 대항하여 단련된 정신—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훈련은 단번에 획득할 수 있는 자산(acquis)이 아니라 무한한 과업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브레너(Brenner)가 언급했듯 영미권 저자들에게 있어 "바슐라르는 뒤늦은 발견"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역사적 인식론'이라는 표현이 그 시초인 바슐라르에게로 다시 거슬러 올라오기까지, 대서양 건너편(미국)에서 그 개념이 아예 새롭게 재발명되어야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Brenner, 2006, p. 121). 한국에서의 수용이 늦어진 것 역시 우리만의 특수한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정신분석적이고, 규범적이며, 교육적인 바슐라르 사유만의 독특한 결이—쿤(Kuhn)식의 패러다임론이든, 실증주의든, 혹은 단순한 시학적 감상이든—그 어떤 '기성 수용 포맷'에도 호락호락하게 길들여지지 않기에 겪어야 했던 보편적인 운명이다.
Gaston Bachelard, 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 (1934/1967), éd. Vrin ; réédité par UQAM en 2008,
Gaston Bachelard, Épistémologie, textes choisis par Dominique Lecourt (1970), PUF ; réédité par UQAM en 2008,
Anastasios Brenner, « Quelle épistémologie historique ? Kuhn, Feyerabend, Hacking et l'école bachelardienne »,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n° 49, 2006/1, p. 113-125,
Thomas S. Kuhn, La structure des révolutions scientifiques (1962), University of Chicag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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