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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철학 #04]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지식의 본질에 대하여

by pragma 2026. 4. 29.

20세기 인식론에는 마땅히 주목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간과되는 흥미로운 패턴이 하나 있습니다. 1949년에서 1969년 사이,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 화학, 과학사(History of Science), 분석철학(Analytical Philosophy), 그리고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이라는 서로 다른 전통에서 작업하던 다섯 명의 사상가가 독립적으로, 철학의 뿌리깊은 믿음 중 하나를 타격했다는 것이죠. 그것은 완전히 명시적이고 언어화 가능한 지식이라는 이상은 실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는 일관된 설명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다섯 명은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 토마스 쿤(Thomas Kuhn), 에드먼드 게티어(Edmund Gettier), 그리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한 번도 같은 자리에 모여 토론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각자 다른 전통에 서서, 다른 방법론으로, 서로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을 뿐이었죠. 그럼에도 이들의 생각이 한 지점으로 수렴했다는 것에 의의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해석은 각 사상가의 입장을 단순화한 측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공통된 구조를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타겟: 완전한 명시적 지식이라는 허상

 

이들이 공통적으로 비판한 대상은 폴라니가 "현대 과학의 공언된 목표"라 일컬었던 것 - 특히 20세기 중반의 과학철학과 분석철학에서 강하게 나타는 경향, 즉, 지식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들를 모조리 제거하고 오직 딱딱한 객관성만을 남기려는 시도였습니다. 각 분야에서 다음과 같은 형태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 철학에서 이 프로젝트는 지식에 대한 '정당화된 진정한 신념(JTB)' 설명의 형태를 취합니다. 즉, 어떤 명제가 참이고, 우리가 그것을 믿으며, 그것을 믿는 데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 명제를 안다(to know)는 것입니다.
  • 과학에서 이것은 실증주의(positivism)라고 부릅니다. 오직 명확하게 진술될 수 있고, 수식으로 도출되며, 누구나 똑같이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이 진짜 지식이라는 믿음입니다.
  • 교육학에서는 지식 전달을 곧 규칙과 정의, 명제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과정이라고 가정하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매뉴얼만 완벽하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라고 볼 수 있죠.

 

다섯 사상가는 이러한 이상이 어느 층위에서 나타나든, 본질적으로 심각한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진짜 지식'이라 부르는 것들의 뿌리에는 결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A. 라일: 명시적 지식의 무한 퇴행을 지적하다

 

길버트 라일의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 (1949년), 제2장 "방법적 지식과 명제적 지식(Knowing How and Knowing That)" (25–58쪽)은 심리철학 측면에서 공격을 시작합니다.

 

먼저 라일은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짓습니다. 사실과 규칙, 정의 등에 관한 '명제적 지식(knowing that)'과 체스 두기, 환자 진단, 문법에 맞는 대화처럼 실질적인 수행 능력을 뜻하는 '방법적 지식(knowing how)'이 그것입니다. 흔히들 '방법적 지식'은 그저 '명제적 지식'의 하위 개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곤 하지요. 즉, 지적으로 행동하려면 먼저 머릿속으로 행동 지침(규칙)을 훑어봐야 하며, 행동의 영리함은 그 규칙을 미리 지적으로 승인한 데서 나온다는 식입니다. 라일은 이를 '지성주의 전설(intellectualist legend)'이라 부르며 비판했습니다.

 

라일의 반박 논리는 명쾌합니다. 바로 '퇴행 논증(infinite regression)'이죠. 만약 모든 지적인 행위가 규칙을 참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규칙을 참조하는 행위' 그 자체도 하나의 지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참조 행위를 하기 위해 또 다른 '참조를 위한 규칙'을 먼저 살펴봐야 하고,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어 결국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연쇄는 결코 끝이 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라일은 지적인 수행(intelligent)을 지성적인 사고(intellectual)로만 정의할 수 없으며, 방법적 지식은 명제적 지식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습니다. 숙련된 수행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두 단계의 작업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작업입니다. 지성은 행동에 앞선 그림자 같은 예행연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행동하는 과정' 속에 녹아 있습니다.

 

결국 전문성이나 기술 같은 핵심적인 지식은 근본적으로 말이나 규칙 같은 명제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실행이라는 맥락에서 떼어내어 규칙이라는 저장소에 가두려는 순간, 그 본질이 파괴되고 말죠.


B. 폴라니: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마이클 폴라니의 저서 『암묵적 영역(The Tacit Dimension)』(1966)은 명제로 환원되지 않는 이 독특한 지식이 실제로 무엇이며,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가장 체계적으로 규명해냅니다.

 

그의 핵심 명제는 명료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4쪽)." 수천 명의 인파 속에서도 친구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지만 정확히 어떤 특징 때문에 알아봤는지는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 혹은 숙련된 의사가 검사 결과를 분석하기도 전에 환자의 상태에서 어떤 패턴을 직감하는 경우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과학자가 어떤 문제가 왜 중요한지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전부터 그 문제가 탐구할 가치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순간, 지식은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폴라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폴라니는 암묵지의 기저에 깔린 구조를 '두 항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바로 근접 항(proximal term)과 원격 항(distal term)입니다. (용어를 써서 죄송하지만, 폴라니를 이해하는 데는 필수적입니다)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로 길을 찾는 상황을 떠올려 봅시다. 그는 손바닥에 전해지는 지팡이의 진동(근접 항)을 느끼지만, 정작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은 지팡이 끝에 닿는 물체(원격 항)입니다(12쪽). 이때 손바닥의 감각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기 위한 '매개체'입니다. 즉, 우리는 보조적인 수단들로부터(from) 초점이 되는 의미를 향해(to) 주의를 기울이지요. 이것이 암묵지의 핵심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다음 네 가지 측면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 기능적 측면: 근접 항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 현상적 측면: 우리는 원격 항이 나타나는 모습을 통해 근접 항을 의식한다.
  • 의미적 측면: 근접 항의 의미는 항상 그것이 가리키는 원격 항에 투사된다.
  • 존재론적 측면: 암묵지는 이 두 항이 결합하여 형성하는 하나의 '포괄적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실천적 함의에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매개체로 작동하던 근접 항에 강제로 초점을 맞추는 순간, 그 지식이 구성하던 전체적인 형체가 무너집니다. 손가락 위치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피아니스트가 결국 음악의 흐름을 놓쳐버리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18-19쪽). 폴라니는 이를 '억제되지 않은 명료함의 위험(hazard of unbridled lucidity)'이라 불렀습니다. 모든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어 분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 대상이 가진 본연의 일관성을 해체해버리는 역설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 논리를 과학 철학에 적용하면 결론은 더욱 급진적입니다. 개구리의 해부학적 구조나 복잡한 경제적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대상을 이미 암묵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암묵적 잔여물을 제거하고 100% 명시적인 이론을 세우겠다는 실증주의적 이상은 결국 제 발등을 찍는 격입니다(20-21쪽).

 

특히 폴라니는 플라톤이 제기한 '메노의 역설(Meno’s Paradox)'을 암묵지를 통해 멋지게 해결합니다(21-22쪽).

※ 메노의 역설이란?
 "우리는 자신이 아는 것도 찾을 수 없고, 모르는 것도 찾을 수 없다." 아는 것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니 찾을 필요가 없고, 모르는 것이라면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르며 설령 찾았다 해도 그것이 정답인지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새로운 지식을 향한 탐구(연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폴라니는 암묵지가 이 모순을 깨뜨린다고 주장합니다. 과학자는 문제의 정답을 명확히 진술할 수는 없지만, 그 문제 이면에 숨겨진 '일관성'을 미리 감지하죠. 이 '표현할 수 없는 예견(inarticulate foreknowledge)'이 탐구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23-24쪽). 실제로 과학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발견은 대개 논리적 연역이 아니라 이러한 암묵적 직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당시 그것을 뒷받침할 관측 데이터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주의 구조가 이토록 복잡할 리 없다는, 수식화하기 어려운 '아름다움과 일관성'에 대한 직관을 믿고 평생을 투신했습니다. 발견이란 늘 발견자조차 다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함의를 품고 찾아오지만, 연구자는 자신의 암묵적 직관을 믿고 그 길에 기꺼이 투신합니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과학의 역사마저, 실은 이러한 암묵적 확신 없이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C. 쿤: 패러다임과 암묵지의 전수

 

토마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1962)에서 이러한 통찰을 과학사회학의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구체적으로, 과학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며, 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분석하는 데 암묵지 개념을 끌어들인 것이죠.

 

제5장 「패러다임의 우선성」에서 쿤은 과학적 전통의 일관성이 결코 명시적인 규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특정 전통(패러다임)에 속한 과학자들은 어떤 가설이 타당한지, 어떤 문제를 연구할지, 그리고 무엇을 정답으로 수용할지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합의를 뒷받침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아무도 일관된 답변을 내놓지 못합니다.

 

성숙한 패러다임을 지배하는 명시적 규칙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매번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학자들이 뽑아낸 그 어떤 공식이나 규칙도 실제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공유하는 살아있는 기준보다 너무 엄격하거나, 혹은 너무 느슨하기 때문입니다. 쿤은 이 장의 주석에서 폴라니를 직접 인용하며, 과학자들이 실천을 통해 습득했으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암묵지(tacit knowledge)'에 의해 인도된다고 명시했습니다.

 

쿤이 주목한 암묵지의 핵심 기제는 바로 '예제(exemplar)'입니다. 과학자들은 추상적인 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실전에 적용하는 식으로 훈련받지 않습니다. 대신 교과서의 표준적인 풀이 과정이나 실험실의 실습 사례처럼, 이미 성공적으로 해결된 '풀이된 예제'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며 사물을 보는 감각 자체를 훈련하죠. 충분한 예제에 노출된 과학자는 새로운 문제와 기존 문제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할 때 규칙을 대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직관적으로 유사성을 '봅니다(see)'. 예제가 전수하는 이 고유한 감각은 정보 손실도 없이 명시적인 규칙으로 변환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1969년판 후기에서 쿤은 '공유된 예시로서의 패러다임'이야말로 자신의 주장 중 가장 새롭고도 가장 이해받지 못한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습니다. 정상 과학(패러다임)을 가능케 하는 힘, 즉 무엇이 좋은 문제이고 타당한 결과인지를 알아보는 눈은 논문이나 교과서만으로 길러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제식 훈련을 통해 전수되고 오직 '직접 행함으로써만' 재현될 수 있는, 예시적 실천의 암묵적 잔여물인 것입니다.


D. 게티어: 명시적 조건의 불충분성

 

에드먼드 게티어는 단 세 페이지짜리 논문 「정당화된 진정한 신념은 지식인가?」(1963)를 통해 분석철학의 심장부에서 '명시적 지식'이라는 이상에 치명타를 날렸습니다.

 

플라톤 이래 전통적인 인식론은 지식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JTB)'으로 정의해왔습니다. 즉, ① 어떤 내용이 참이고(True), ② 그것을 믿으며(Belief), ③ 믿음에 합당한 근거가 있을(Justified) 때에만 그것을 '지식'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티어는 이 세 조건이 완벽히 충족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결코 지식이라 부를 수 없는 반례들을 제시했습니다.

 

그중 하나를 보겠습니다. 스미스는 존스가 포드 차를 타고 왔다는 강력한 증거를 토대로 "존스는 포드를 가졌거나, 혹은 브라운은 바르셀로나에 있다"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존스는 실제로 포드를 소유하지 않았고, 정말 우연히도 브라운이 바르셀로나에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스미스의 신념은 참(T)이었고, 본인도 믿었으며(B), 근거도 충분(J)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스미스의 '지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저 운 좋게 얻어걸린 추측에 불과할 뿐입니다.

 

게티어 이후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학자가 정의를 수정하려 애썼습니다. "거짓 전제가 없어야 한다(No false lemmas)", "믿음 형성 과정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reliability" 등 온갖 조건을 덧붙였지만, 그 어떤 시도도 완벽한 정답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 글의 바로 이전 글은 게티어의 공격으로 파산한 JTB를 심폐소생하려는 처절한 시도를 자세히 다룹니다:

[철학 #01] '안다'는 착각과 지식의 진짜 조건

우리는 일상에서 "그거 알아!"라는 말을 참 쉽게 합니다. "주식 차트 보는 법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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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얻을 수 있는 뼈아픈 교훈은 폴라니나 라일의 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게티어 이후 철학자들이 매달린 것은 JTB에 '한 줄의 추가적인 조건'을 다는 작업이었죠.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패했는데, 이들이 지식에 있어 결코 문장이나 조건으로 진술될 수 없는 어떤 성질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식 주체가 가진 증거가 현상과의 일치, 즉, 참(truth)과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저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폴라니의 용어를 빌리자면 '로부터-로(from-to)'의 관계가 어긋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단서(근접 항)는 쥐고 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이 엉뚱한 곳을 향하다 우연히 실재(원격 항)와 마주친 것이죠. 정당화(Justification)는 명제의 영역이지만, 단서를 통해 실재를 추적해내는 일은 정당화에 앞서는 암묵적인 영역입니다. 정의에 아무리 많은 단어를 보태도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는 이유는, 그 구멍이 정의(definition)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E. 비트겐슈타인: 규칙, 경첩, 그리고 실천의 토대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 두 가지 경로로 접근하는데, 하나는 언어철학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 정당화의 구조에 관한 관점입니다.

 

『철학적 탐구』(§§185–242)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유명한 '규칙 따르기(rule-following)' 논증을 펼칩니다. 그는 "2를 더하라"는 수열을 배운 한 학생의 사례를 듭니다. 이 학생은 1000까지는 규칙대로 잘 쓰다가, 갑자기 1004, 1008, 1012를 쓰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대체 어떤 근거로 이 학생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명시적으로 정해진 규칙 그 어디에도 1000 이후에 "2를 더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미리 결정해둔 내용은 없습니다. 모든 규칙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그 해석조차 또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 규칙이 될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무한한 해석의 굴레에 빠지게 되죠.

 

비트겐슈타인이 내린 결론은 명쾌합니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내면적인 정신 작용이나 명시적인 해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practice), 즉 훈련을 통해 공유된 '삶의 방식'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저에는 "이것이 규칙의 의미이고 우리는 이렇게 해석했다"라는 설명이 아니라, "우리는 그냥 이렇게 행동한다"라는 원초적인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확신성에 관하여』(§§341–343)에서 그는 이 논리를 탐구 자체의 구조로 확장합니다. 어떤 탐구나 질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만 하는 특정한 명제들이 존재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죠.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문을 지탱하는 '경첩(hinges)'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던지는 모든 질문과 의심은 역설적으로 의심받지 않는 어떤 명제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비트겐슈타인은 포착합니다(§341). 만약 문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경첩은 반드시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죠(§343).

 

이러한 '경첩 명제'들은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안다'고 말하는 지식과는 결을 달리합니다. 그것들은 모든 탐구의 전제가 되기에, 탐구를 통해 검증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첩 명제들을 의식적으로 소유하거나 명시적으로 진술하지 않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신 그것들을 토대 삼아 행동할 뿐이죠. 만약 이 경첩들을 억지로 뽑아내어 정밀하게 조사하려 든다면, 지식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이 가능했던 틀 자체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이는 폴라니가 말한 '보조항(subsidiaries)'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경첩 명제들은 전체 인식 체계에서 '근접 항(proximal term)'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즉,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from) 모든 초점적 앎이 시작되는 침묵의 배경인 셈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의 분석을 통해, 폴라니는 지각과 기술의 구조를 통해 각자 출발했으나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수렴과 그 의의

 

지금까지 살펴본 다섯 가지 논증은 논리(라일), 현상학(폴라니), 사회학(쿤), 인식론(게티어), 언어학(비트겐슈타인)이라는 각기 다른 층위에서 전개되지만, 하나의 공통된 구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논증은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명시적 지식'을 가능케 하는 필수적인 토대이자, 결코 언어화될 수 없는 지식의 영역들—실천적 역량, 암묵적 예견, 예제 기반의 훈련, 진리의 추적, 그리고 경첩적 확신—을 지목합니다. 또한, 이러한 '암묵적 잔여물'을 억지로 명시적인 형태로 바꾸어 제거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거나, 무한 퇴행을 일으키거나, 혹은 포착하려 했던 역량 자체를 파괴하고 만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통찰이 주는 실질적인 함의는 상아탑의 담장을 훨씬 넘어섭니다.

 

  • 과학 방법론에 대하여: 라일의 퇴행 논증과 쿤의 예제 개념은 기계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좋은 과학이 만들어지는 '매뉴얼' 따위는 존재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숙련된 연구자의 암묵적 판단은 결코 명시적인 규칙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방법론을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취급하는 교육은 과학자가 아니라, 그저 정교한 절차를 수행하는 '테크니션'만을 양성할 뿐이죠.

 

  • 인식론에 대하여: 게티어의 사례들은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을 명제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뿌리부터 잘못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조건을 더 추가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식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폴라니의 설명처럼, 지식은 언어화된 기준을 충족하는 '명제적 상태'라기보다 무언가를 통해 실재를 바라보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 전문 지식을 전수하는 모든 학문에 대하여: 쿤의 예제 개념은 교육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텍스트로 된 지식이 아니라, 암묵적인 지각 역량을 형성하게 돕는 '풀이된 사례(worked examples)'임을 보여줍니다. 이론은 교과서에 담을 수 있지만, 암묵적 역량은 오직 직접 행함으로써만 체득될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수렴이 더욱 놀라운 이유는 각 논증의 독립성에 있습니다.

  • 길버트 라일은 옥스퍼드에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정신과 육체를 별개의 실체로 보아, 지적인 행위 이전에 반드시 정신적인 계획이 선행한다고 보는 관점)을 공격하던 철학자였습니다.
  • 마이클 폴라니는 맨체스터에서 자유로운 과학 탐구의 조건을 성찰하던 물리화학자였습니다.
  • 토마스 쿤은 하버드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다 과학사학자로 전향한 인물이었습니다.
  • 에드먼드 게티어는 웨인 주립대학교의 분석철학자였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어떤 학문적 분류도 거부한 채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결론을 평이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과학적이든, 실천적이든, 혹은 지각적이든, 원칙적으로 명시화될 수 없는 '암묵적 토대' 위에 서 있지 않은 지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명시적인 지식은 언제나 그것이 담아낼 수 없는 더 깊은 무언가의 표면일 뿐이죠.


References

 

  • Ryle, G. (1949). The Concept of Mind. Hutchinson. Chapter II, "Knowing How and Knowing That," pp. 25–58.
  • Polanyi, M. (1966). The Tacit Dimens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Kuhn, T.S. (1962/2012).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apter V, "The Priority of Paradigms," note 1; Postscript—1969, §3 "Paradigms as Shared Examples."
  • Gettier, E.L. (1963).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Analysis, 23(6), pp. 121–123.
  • Wittgenstein, L. (1953).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lackwell. §§185–242.

Wittgenstein, L. (1969). On Certainty. Blackwell. §§34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