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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철학 #05] 입문용 철학서에 대하여: 평범함은 거부한다

by pragma 2026. 4. 30.

 
철학책은 어렵다. 머리가 깨지도록 어렵다. 과학철학을 학교에서 공부한 주인장도 늘 어렵다. 철학이 어렵지 않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불세출의 천재이거나 지독한 허풍쟁이일 가능성이 높다.
 
시중에 철학 입문서라고 돌아다니는 책들의 문제점이 하나 있는데, 철학과 철학사를 혼동하는 것이다. 소피의 세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처럼 주요 사상가들의 생각을 훑는 류는 엄밀히 말해 철학사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어쨌고, 칸트가 어쨌고, 니체가 어쨌고를 자랑스럽게 읊어대는 것은 철학사 지식의 수집일 뿐, 철학적 사고의 수행과는 무관하다. 
 
철학은 문제를 발굴하는 안목부터 논리적 해결에 이르는 일련의 프로세스다. 정답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결코 철학의 무용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정답 없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철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철학적 문제가 쉽게 찾아지는가? 쉬우면서도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상의 참모습을 알 수 있는가?", "어떤 행동이 도덕적이며 그렇지 않은 행동은 무엇인가?", "언어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식의 질문은 간단해 보이지만 수많은 논문을 양산한 질문들이다. 그리고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아마 영원히 정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 
 
우리가 철학자들이 내놓은 저마다의 논증을 복기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앞선 이들의 문제 해결 과정을 살펴야 뒷북을 치지 않고, 새로운 접근을 위한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정이지 시작이 아니다. 철학의 시작은 생각이다.
 
어쨌든 철학 입문서라면 마땅히 사고하는 법과 철학적 질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치는 게 먼저다.
주인장이 소개할 책들은 이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에 인지도가 0에 가깝지만 매우 훌륭한 책이다.
총 세 권인데, 한 권은 철학 전반, 다른 하나는 인식론, 나머지 하나는 기호 논리학이다.
 
주의사항:
 

  • 분석철학 편향: 저자들은 모두 분석철학 전통에서 훈련받은 이들이다. 영미권 철학의 주요 의제에 치우쳐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 구입의 번거로움: 한국 서점에는 정보가 거의 없다. 저자들이 독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아마존(KDP)을 통해 독립출판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50달러가 넘는 일반 교과서와 달리 권당 20달러 남짓의 염가에 구매할 수 있다. (미국 아마존 49달러 이상 구매 시 무료 배송을 활용하자.)

 
 
의심 많은 분들은 궁금할 것이다. '주인장, 당신 어디서 굴러먹던 개 뼉다구 팔아먹는 사기꾼 아니오?'
그래서 저자들에 대해 확실히 보증하고 넘어가겠다. 주인장도 제 돈 주고 책 살 땐 엄청 깐깐하게 따지는 사람이다.
 

  • Michael Huemer : 현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 철학교수이며, 주 분야는 윤리학, 인식론, 정치철학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탑 티어 학술출판사인 루틀릿지(Routledge)와 팰그레이브 맥밀런(Palgrave MacMillan)에 다수의 책을 낸 바 있다. 이런 출판사는 아무 원고나 안 받아주기로 유명하다. 조금 안심이 되시는가?
  • Peter Smith: 현재는 은퇴했는데, 이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논리학과 수리철학을 가르쳤다. 사실 조금 이따 소개할 책은 원래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것을 저자가 따로 아마존에서 독립출판 한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교과서를 냈을 정도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리?

 
서론이 길었으니 바로 책 소개부터 하겠다. 책의 내용보다는 어째서 이 책이 독자 친화적인지에 중점을 맞추겠다.
 

<Knowledge, Reality, and Value>, by Michael Huemer

 

휴머 교수의 첫 독립출판이다. 아마존을 자주 들락거리지 않았더라면 주인장도 이 책의 존재를 아예 몰랐을 것이다.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에서 이 책의 미리읽기 버젼을 올려놓았다. 영어 수준이 어떠한지는 독자 여러분이 직접 판단하기를 바란다.

링크: https://spot.colorado.edu/~huemer/sample8.pdf

* 주인장이 확인한 결과 알라딘에서 해외주문이 가능하다.

 

이 책은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싸워온 주제들을 현대적인 논리 구조에 따라 재배치했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고 칸트는 이렇게 말했고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논리학 기초) → 인식론(지식의 근거) → 형이상학(존재의 본질) → 윤리학(가치 판단) 순으로 빌드업되는 구조이다. 그래서 제목이 Knowledge, Reality, and Value인 것이다. 굉장히 직관적인 예시를 많이 들고 있어서 독자가 어렵다고 느낄 소지는 적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Further Readings에 소개된 책이나 논문 등을 통해 확장해 나가면 된다. 부록으로 수록된 '학부생을 위한 철학적 글쓰기 지침'은 논리적 글쓰기의 뼈대를 잡고 싶은 이들에게 본문만큼이나 가치 있는 보너스다.

 

 

<Understanding Knowledge>, by Michael Huemer

 

 

휴머 교수의 두번째 독립출판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 한국 인터넷 서점의 정보망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미국 아마존에서만 구입이 가능하다.

철학에 단순히 흥미가 있는 것을 넘어 본인이 인식론(Epistemology or Theory of Knowledge)에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하다.

인식론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게 진짜 아는 게 맞는지 검증하는 철학의 한 분과이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인식론의 대표적인 문제이다:

 

  • "너 그거 진짜 알아? (지식의 정의)":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우연히' 맞춘 것인가, 아니면 '정당한 근거'가 있는 진짜 지식인가.
  • "꿈이랑 현실이랑 어떻게 구분해? (실재론 vs 회의주의)":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 책이 진짜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뇌가 만들어낸 정교한 환상일까?
  • "어디서 온 지식이야? (지식의 근원)": 우리가 가진 지식이 직접 체험한 것인가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성)인가, 혹은 남에게 들은 것인가?

역시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에 샘플이 올라와 있으니 링크를 걸어둔다. 링크: https://spot.colorado.edu/~huemer/sample9.pdf

주제가 주제인만큼 전문용어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는 용어를 친절히 해설하며, 직관적인 예시를 항상 곁들인다. 문체만 쉽지 다른 요소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철저히 지켜 쓰여졌다.

 

<An Introduction to Formal Logic>, by Peter Smith

 

형식논리학 책은 드럽게 비싸다. 국내에는 아마 어빙 코피의 코어 논리학이 인지도가 높은데, 600페이지나 넘는 책을 입문서라고 권하는 심보를 도저히 모르겠다. 완독할 수 없는 입문서는 종이 뭉치에 불과하다. 주인장은 입문서가 불필요하게 두꺼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물론 대안이 존재한다. 영어가 도와준다면 스미스 교수의 이 책과 Harry Gensler의 책이 구성과 서술 면에서 훨씬 좋다고 본다 (덜 두껍다). 후자의 경우 연습문제가 많아서 도움이 된다. (논리학 교재에서 정답과 풀이는 제미나이나 GPT만큼 잘 해 주는 친구가 없다. 농담 아니다. 인공지능의 모태가 수리논리학이니까)

 

스미스 교수는 친절하게도 본인의 모든 저작(수리논리 입문, 괴델의 정리 등)을 pdf 버전으로 블로그에 올려두었다. 링크를 첨부한다: https://www.logicmatters.net/ifl/ 이 블로그에는 논리학의 다른 참고문헌들도 열람 가능하므로 전공자에게는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An Introduction to Formal Logic - Logic Matters

Quick links The book and how to get it Logic bites and snippets Corrections Exercises and worked answers On truth trees Legacy pages: the first edition Other supplementary materials Other books The book and how to get it An Introduction to Formal Logic wa

www.logicmatters.net

 

그래도 나는 종이책이 좋다 하시는 분은 미국아마존이나 교보문고에서 구입이 가능하니 참고 바란다.

링크: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36386126

 

An Introduction to Formal Logic | Peter Smith - 교보문고

An Introduction to Formal Logic |

product.kyobobook.co.kr

 

 

 
철학을 공부하면 번역된 용어가 참 사람을 힘들게 한다. 비판적 생각을 하기 전에 단어의 정의를 따지다가 포기해서야 되겠는가.
상당수의 철학 용어는 원어로 읽을 때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첫걸음부터 영어로 시작해 개념의 뿌리를 제대로 박는 것이 지름길일 수 있다. 이 책들이 훌륭한 가이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c.f.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1912)>도 처음 읽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포괄적인 입문서는 아니다.
c.c.f. 토머스 네이글의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1987)>도 쉽게 접근하기에는 좋다. 그러나 쉬운 만큼 책이 얇다는 것은 함정.
 


 
사고의 도구를 챙겼으면 이제 거인들의 어깨 위로 올라갈 차례다. 그런데, 한국에서 서양철학사 하면 으레 추천목록에 오르는 책이 러셀(Bertrand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과 힐쉬베르거(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다. 가끔 코플스턴(Frederick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의 이름도 나오는데, 이 책들은 대중 접근에 명확한 한계를 노출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은 문체가 유려하지만 저자의 반 독일 관념론 성향이 아낌없이 드러난 책으로, 분석철학의 대부인 만큼 철저히 영미 경험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썼다. 그러다 보니 유려한 문체에 나도 모르게 설득될 위험이 있어 역사서로서의 덕목은 아니다.

 

힐쉬베르거와 코플스턴 모두 성직자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책을 쓰면서 본업과 일심동체되지는 않았으나 스타일이 너무 올드하다는 것-둘 다 70년대 책이다-이 문제다. 특히 코플스턴은 원서로 4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열 권이 넘을 만큼 양이 매우 방대하여 주제별로 깊게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굳이 큰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으며, 저자의 전공에 따라 파트별 서술의 질적 차이도 존재한다. 이에 다른 나라에서 널리 추천되는 서양철학사 책들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교양 수준이나 학부생 정도에게 알맞는 난이도이다.

좌측: 워버튼의 철학의 역사. 한국어 번역본 있음. 우측: 매기의 위대한 철학자들. 원서는 국내에서 구매 가능

EASY

먼저 나이젤 워버턴의 『철학의 역사』(Nigel Warburton, A Little History of Philosophy, Yale University Press)는 한 권으로 가볍게 전체 흐름을 훑기에 최적화된 입문서다. 소피의 세계는 격식을 너무 많이 빼서 일부러 제외했는데, 이 글을 읽을 독자라면 조금 더 진지한 철학서를 원할 것 같았다. 브라이언 매기의 『위대한 철학자들』(Bryan Magee, The Great Philosophers, Oxford University Press) 역시 한 권 분량인데, 모든 철학자를 나열하는 대신 15명의 주요 인물을 선정하여 누스바움, 케니, 코플스턴, 피터 싱어, 존 설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의 대담으로 해설한 명저다. 아쉽게도 국내 미번역 상태이지만, 다행히 유튜브에 당시 BBC 방송 원본 영상이 공개되어 있어 시청이 가능하다는 점은 큰 위안이다. 영어 실력이 되는 사람은 원서로 읽는 것을 적극 권한다 (알라딘 중고 재고 있음. 교보는 한때 2만원에 팔았는데, 아깝다).

앤서니 케니 서양철학사 시리즈. 우측은 합본

 

INTERMEDIATE

앤서니 케니 경의 서양철학사 시리즈(Anthony Kenny,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는 고대(Ancient Philosophy), 중세(Medieval Philosophy), 초기 근대(The Rise of Modern Philosophy), 근대(Philosophy in the Modern World) 총 4권으로 구성된다. 국내 서광사 번역본은 3권을 '근대철학', 4권을 '현대철학'으로 옮겨놓았는데 이는 원제의 맥락을 훼손한 처사다 (제목을 저 따위로 붙여놓은 영어 실력이면 본문 번역도 그닥 신뢰는 안 가지만). 케니는 중세철학과 비트겐슈타인에 정통한 석학이나 본인의 주관을 최대한 절제하며 (적어도 주인장은 그렇게 느꼈다), 전체 역사적 맥락을 브리핑 후 논리·인식론·윤리 등 세부 주제별 설명을 덧붙이는 유익한 구성을 취한다.

 

워버튼보다 풍부하고 코플스턴보다 압도적으로 짧으면서도 필수 지식을 모두 담아낸 이 시리즈는 2000년대 이후의 동향이 빠졌다는 점과 국내에서 합본(Single Volume Edition)으로 나오지 않아 비용 부담이 크다는 단점이 있으나 (원서나 번역본이나 권당 삼만원이 넘는다), 현재 글로벌 스탠다드에 가장 부합하는 정석적인 철학사라 할 수 있다. 전문가들 수준에서야 케니가 미흡한 면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잣대를 들이대면 읽을 책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른 서양철학사 책들에 대한 짤막한 의견: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 (The Story of Philosophy)는 필력 하나만큼은 좋지만 이미 나온 지 정확히 백 년 된 책이다. 시중에는 훨씬 더 좋은 책이 넘쳐난다.

시르베크의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Thought)는 거시적 조망에는 탁월하나, 철학 내부의 체계를 세우기엔 케니에 비해 한계가 명확하다. 병행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훌리안 마리아스의 철학사(History of Philosophy)는 현상학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색채가 있다. 여러모로 영미권과는 다른 스타일인데, 영미권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보조 교재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