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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철학 #07] 패러다임이라는 단어에 숨은 토머스 쿤의 지적 모순

by pragma 2026. 5. 2.

토머스 새뮤얼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1962)는 좋은 의미에서 파급력이 큰 저서였다. 과학의 진보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지만, 역설적으로 과학자 세계보다 그 외 분야에 인지도가 더 큰 책이기도 하다. 쿤을 몰라도 '패러다임'은 어디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다, 그 단어의 유행의 근원지가 바로 이 책이다.


쿤의 진짜 공헌은 따로 있다. 그는 과학을 순수한 논리와 실험의 산물로만 보던 기존 시각에 균열을 냈다. 과학자들도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움직이며, 그 공동체의 문화·권력·관성이 어떤 이론이 살아남고 어떤 이론이 폐기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른바 과학사회학의 '실천적 전환(practical turn)'이다. 실험실이 진공 속의 논리 기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부대끼는 사회적 공간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 안에서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묻는 과학기술학(STS) 전체가 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이 기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쿤 본인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급력이 크다는 것과 논증이 탄탄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지점 몇 가지를 짚어보겠다.
줄거리는 제미나이에게 물어보면 2초 내로 깔끔히 정리해 주니 생략하겠다.


1. 서술의 단순화: 실상은 더 복잡했다

쿤의 핵심 주장은 과학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 이론 체계(패러다임)가 위기를 맞아 새로운 체계로 통째로 교체되는 방식으로 진보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사의 사례들을 끌어들이는데, 막상 들여다보면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틱하게 단순화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천문학 (제7장, 제10장)

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교체되는 과정을 전형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 꼽는다. 천동설이 복잡한 '주전원(epicycle)'을 동원하며 한계에 봉착해 붕괴했다고 묘사하는데, 비전공자를 위해 설명하자면 주전원이란 지구 중심 모델에서 행성의 불규칙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인 원 위의 원, 즉 궤도 수정 장치다. 쿤의 서술대로라면 지동설은 이 복잡한 장치 없이도 행성 운동을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코페르니쿠스의 초기 모델 역시 행성의 원형 궤도를 고집하느라 천동설만큼이나 복잡한 주전원을 사용해야 했다. 지동설이 등장하자마자 압도적인 간결함으로 구 패러다임을 압살했다는 서술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케플러가 타원 궤도를 도입하고, 뉴턴이 중력 이론으로 이를 설명하기까지 100년 이상이 걸렸다.

 

화학 (제6장, 제9장)

쿤은 라부아지에가 산소를 발견하며 플로지스톤 이론을 박살 낸 것을 혁명이라 규정한다. 플로지스톤 이론이란 연소가 물질 안에 있는 '플로지스톤'이라는 원소가 빠져나가는 현상이라고 설명한 18세기의 지배적 이론이다. 그러나 실상은 조셉 프리스틀리의 '탈플로지스톤 공기' 실험 데이터 등 기존 연구 성과와의 연속성이 뚜렷하다. 용어만 바뀌었을 뿐 실험 기구와 계량법은 그대로 누적되어 왔으며, 라부아지에 본인도 구 패러다임의 방법론적 토대 위에서 결론만 뒤집었을 뿐이다.

 

물리학 (제9장, 제10장)

뉴턴 역학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 역시 쿤의 주 모델이다. 쿤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질량과 뉴턴의 질량은 개념 자체가 다르므로 뉴턴의 이론은 논리적으로 폐기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물리 현장에서는 뉴턴 역학이 빛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저속 영역(v << c)에서의 근사치로, 또한 양자역학의 거시적 한계(대응 원리)에서의 근사치로 여전히 기능한다. 둘 사이의 관계는 '파괴적 교체'라기보다 '포괄적 확장'에 가깝다.
 
양자역학 사례는 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쿤의 모델을 따르면 양자역학 혁명의 순간에 물리학 공동체는 단일한 새 패러다임으로 일제히 전환했어야 한다. 실제로는 어땠는가. 플랑크 본인이 자신의 에너지 양자화 가설을 수식적 편법으로 여기며 반쯤 믿지 않았고, 보어의 '대응 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는 새 양자 이론이 기존 고전 물리학과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요구 자체를 이론 내부의 설계 원칙으로 삼았다. 혁명이 아니라 접합이었다. 더 나아가, 이른바 혁명 이후에도 물리학 공동체는 단일한 패러다임으로 수렴하지 않았다. 코펜하겐 해석, 드브로이-봄의 파일럿 파동 이론,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이 지금까지도 공존하며 경쟁한다. 쿤의 모델이 예측하는 혁명 이후의 안정된 단일 패러다임은 양자역학의 역사 어디에도 없다.

 

생물학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역시 단절적 혁명으로 보기 어렵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나 에라스무스 다윈의 초기 사상에 의해 진화론적 담론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며, 다윈의 성취는 이를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정교화한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전복이 아니라 점진적인 지적 진화의 산물이다.

 

지구과학

판 구조론은 쿤의 모델이 가장 잘 들어맞는 사례처럼 보인다. 1960년대 이전까지 지질학계는 대륙이 고정되어 있다는 '고정론'이 지배적이었고,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은 수십 년간 주류에게 외면당했다. 해저 확장의 증거들이 누적되면서 판 구조론이 급속히 수용된 1960년대의 전환은 확실히 쿤적 혁명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이 사례를 더 들여다보면 오히려 쿤의 모델이 흔들린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수십 년간 거부된 일차적 이유는 공동체의 패러다임적 저항이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메커니즘이 없었다. 베게너는 대륙이 이동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엇이 수천 킬로미터 두께의 대륙을 수평으로 밀어낼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것은 이론의 패러다임 외적 저항이 아니라, 이론 자체의 설명적 공백이었다. 전환이 일어난 것은 해리 헤스의 해저 확장설(1962)과 바인-매튜스-모를리 가설(1963)이 고지자기 줄무늬를 통해 메커니즘을 직접 입증한 뒤였다. 즉, 혁명을 만든 것은 데이터의 갑작스러운 폭발이 아니라, 메커니즘 공백을 메운 설명적 진전이었다.
 
더불어, 판 구조론 정립 이전 수백 년간 지질학자들이 쌓아온 광물학·층서학·고지자기 측정 데이터들은 쿤의 틀 안에서 어떻게 분류되어야 하는가? 쿤식으로 보면 이 성과들은 지배적 패러다임이 없던 시기의 산물이므로 '전-과학(pre-science)'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데이터들이야말로 판 구조론 혁명을 가능하게 한 토대였다. 혁명을 만든 재료를 혁명 이전이라는 이유로 미성숙한 과학으로 격하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쿤의 모델은 혁명의 순간만을 조명하고, 그 혁명을 가능하게 한 긴 축적의 시간을 시야 밖으로 밀어낸다.


2. 용어의 주관성: 순환 논리와 정의의 모호함

쿤 본인도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책 안에서 수십 가지 의미로 혼용했다. 마가렛 매스터먼(Margaret Masterman)은 1970년에 쿤의 텍스트를 정밀 분석해 패러다임의 용례를 스물한 가지로 분류해냈다. 단순한 다의성이 아니다. 분석 도구로서의 엄밀함이 결여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순환 논리의 함정이다. 쿤은 '패러다임은 과학 공동체가 공유하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동시에 '과학 공동체는 동일한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설명한다. 무엇이 패러다임인지 정의하기 위해 공동체를 끌어들이고, 그 공동체를 정의하기 위해 다시 패러다임을 끌어쓰는 꼴이다.
 
결국 무엇이 패러다임이고 무엇이 단순한 이론적 유행인지 가려낼 객관적 기준이 사라진다. 이 모호함 때문에 무엇을 '패러다임 전환'으로 규정할지는 전적으로 역사학자의 사후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론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이론에 짜 맞추는 것이다.


3. 공약불가능성의 역설: 진보의 부정 [10장]

쿤이 상대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게 한 주범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마치 '종교적 개종'과 같아서, 새로운 패러다임 하에서는 구 패러다임을 대등하게 비교하거나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 요지다. 비전공자를 위해 풀어 말하자면, 천동설의 언어로 지동설을 완전히 번역하거나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체계는 세계를 보는 근본 전제가 달라서 공통의 잣대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두 가지 지점에서 현실과 충돌한다.
 
첫째, 실제 과학 현장이다. 현대 공학자들은 달에 로켓을 보낼 때 아인슈타인이 아닌 뉴턴 역학을 쓴다. 쿤의 말대로라면 논리적으로 폐기된 이론이 여전히 완벽하게 작동하는 셈이다. 이는 패러다임이 교체되더라도 이전 이론의 설명력이 특정 영역에서 온전히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두 이론 사이에 비교와 번역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둘째,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인데, 만약 두 패러다임 간의 논리적 비교가 정말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보다 '더 진보했다'고 말할 근거를 잃게 된다. 비교할 수 없다면 과학의 역사는 객관적인 발전이 아니라, 그저 시대적 유행에 따른 관점의 이동일 뿐이라는 허무주의적 결론에 도달한다.
 
이 문제를 쿤 자신도 인식했다. 말년의 논문들, 특히 「공약불가능성, 비교가능성, 소통가능성」(1983)과 「자연과학과 인문과학」(1987)에서 쿤은 공약불가능성의 범위를 스스로 좁히기 시작한다. '전면적 공약불가능성'이 아니라 '국소적(local) 공약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번역 문제가 발생하는 건 소수의 상호정의된 핵심 용어군에 한정될 뿐이며, 두 이론이 공유하는 나머지 대부분의 용어들은 이론 선택의 비교 근거로 충분히 기능한다는 것이다 (Kuhn, 1983, pp. 670–671). 공약불가능성이 비교불가능성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쿤은 수학의 비유로 명확히 한다. √2와 1의 비는 공약불가능하지만 얼마든지 비교 가능하듯, 이론 간의 공약불가능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Kuhn, 1983, p. 670).
 
더 근본적인 수정은 번역(translation)과 해석(interpretation)의 구분이다 (Kuhn, 1983, pp. 671–673). 비판자들은 역사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나 라부아지에를 현대어로 설명해낸다는 사실을 들어 공약불가능성 테제가 자기모순이라고 공격했다. 쿤의 응수는 이렇다: 역사가가 하는 일은 번역이 아니라 해석, 즉 과거 이론의 언어를 새로 습득하는 과정이다. 새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 그 언어에서 자기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의 성공이 후자의 가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나아가 뉴턴 역학의 'mass'와 'force'처럼, 서로 상호정의되어 함께 습득해야만 하는 용어군은 그 정의 체계(F=ma)가 적용되지 않는 다른 이론의 언어로 개별 치환이 불가능하다 (Kuhn, 1983, pp. 676–677). 이것이 공약불가능성의 실질적 내용이다.
 
그러나 이 논변은 비판자들을 근본적으로 설득하지 못한다. 쿤의 구분이 오히려 자신의 테제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해석이 성공하는 순간, 즉 역사가가 플로지스톤 이론의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그 역사가는 두 언어 체계를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이중 언어 사용자가 된다. 그 머릿속에서 두 패러다임은 이미 비교되고 있다. 공약불가능성이 실재한다면 해석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야 하고, 해석이 가능하다면 공약불가능성 테제는 스스로 약화된다. 쿤은 이 둘을 동시에 주장한다.
 
언어철학적 전환도 미봉에 그친다. 분류법적 구조가 다르면 소통이 끊긴다고 했는데 (Kuhn, 1983, p. 683), 그렇다면 과학사가 어떻게 누적적으로 기록되고 이해되어 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뉴턴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그 위에서 논쟁한다. 소통이 끊겼다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어야 한다. 쿤 자신도 인정하듯, 의미가 변하는 용어와 보존되는 용어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현재의 의미론으로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Kuhn, 1983, p. 671). 결국 '국소적'이라는 수식어는 공약불가능성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이동시킬 뿐이다. 1962년판 쿤과 만년의 쿤은 사실상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며, 만년의 쿤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4. 비판자들의 반격: 포퍼, 라카토슈, 파이어아벤트

4-1. 포퍼: "쿤의 정상과학은 나쁜 과학이다"

칼 포퍼의 반론은 간결하고 날카롭다. 포퍼의 과학관에 따르면 진정한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반증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이론이 반증 가능한 예측을 내놓고, 실험이 그 예측을 기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과학의 핵심이다(반증주의, falsificationism). 이 기준에서 보면 쿤의 '정상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기존 패러다임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상 현상을 묵인하고 패러다임 자체는 의심하지 않는 공동체, 그것은 포퍼에게 도그마 집단이다. 패러다임을 반증 시도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과학자의 덕목이 아니라 과학을 망치는 태도다.
 
포퍼의 비판이 옳은가? 절반쯤이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과학자가 개별 실험 하나에 이론 전체를 걸어야 한다는 지나치게 영웅적인 과학자 상을 전제한다. 현실의 과학자들은 반증처럼 보이는 데이터를 만나도 일단 실험 오류나 보조 가설의 문제를 먼저 의심한다. 이것이 무조건 나쁜 과학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포퍼가 드러낸 것은 쿤 고유의 문제이기도 하다. 패러다임 내의 관성을 '정상'으로 규범화하면, 언제 이상 현상이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반증으로 격상되어야 하는지 판별할 기준이 사라진다.

4-2. 라카토슈: 쿤과 포퍼 사이를 봉합하려 한 시도

임레 라카토슈는 쿤도 포퍼도 아닌 제3의 위치를 점하려 했다. 그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은 쿤의 혁명 모델이 남긴 가장 큰 숙제를 직접 겨냥한다.
 
라카토슈는 과학 이론을 단독 명제가 아니라 '연구 프로그램'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구 프로그램은 두 층위로 이루어진다. 핵심 이론(hard core)과 그것을 보호하는 보조 가설들의 '보호대(protective belt)'다. 과학자들은 반증 데이터를 만났을 때 핵심 이론 자체를 버리는 게 아니라 보호대를 수정해 핵심을 지킨다. 이것은 쿤의 서술과 실제로 유사하다.
 
그러나 라카토슈는 쿤과 달리 경쟁하는 연구 프로그램들을 합리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진보적(progressive)' 연구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고 그 예측이 확인된다. '퇴보적(degenerative)' 연구 프로그램은 이상 현상을 막기 위해 사후적으로 보조 가설을 덧붙이기만 한다. 플로지스톤 이론의 말기가 전형적이다. 산소 이론이 새로운 현상을 잇달아 예측하고 확인하는 동안, 플로지스톤 이론의 지지자들은 '음의 무게를 가진 플로지스톤' 같은 임시방편 가설을 계속 추가했다. 이 기준이 있으면 두 패러다임을 비교하지 못한다는 쿤의 공약불가능성 테제를 피해 갈 수 있다.
 
라카토슈의 기여는 실질적이다. 다만 그 역시 한계가 있다. 연구 프로그램이 '진보적'인지 '퇴보적'인지 판별하는 시점의 문제다. 어떤 이론도 초기에는 이상 현상이 있고, 나중에 해소되기도 한다. 지금 당장 퇴보적으로 보이는 프로그램이 20년 뒤에 결정적 예측을 내놓을 수도 있다. 라카토슈의 기준은 사후(事後)적으로는 명확하지만 사전(事前)적으로는 모호하다.

4-3. 파이어아벤트: 쿤을 쿤보다 더 밀어붙이다

쿤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공약불가능성'이라는 용어는 파이어아벤트와 쿤이 독립적으로 도달한 개념이다 (Kuhn, 1983, p. 684, n. 2). 그러나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는 쿤이 멈춘 자리에서 더 나아갔다. 『방법에 반하여』(1975)의 요지는 단순하다: 과학을 특권적 지식 형성 방법으로 만들어 주는 단일한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
 
파이어아벤트의 역설적 기여는 쿤을 보수적으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쿤의 정상과학은 파이어아벤트에게 지적 억압의 제도화다. 공동체의 패러다임에 순응하는 과학자 상은 창의적 일탈을 가로막는 교조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파이어아벤트가 보기에 진정한 과학의 진보는 방법론적 무정부주의, 즉 기존 패러다임을 의식적으로 위반하는 '반귀납(counter-induction)'을 통해 일어났다.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의 기준으로 보면 명백히 열등한 이론을 고집했던 것이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 것처럼.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은 자극적이고 과장되어 있지만 쿤의 이론에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패러다임 내의 정상과학이 규범이 되면, 패러다임을 횡단하는 창의적 발상은 어떤 제도적 지위를 얻는가? 쿤의 이론 안에서 혁명가는 어디서 나오는가?


5. 쿤 자신의 수정: 2판 후기와 그 이후

쿤은 비판에 귀를 닫은 사람이 아니었다. 1969년 2판 후기(Postscript)에서 그는 패러다임의 모호성을 인정하고, 이를 '규율 행렬(disciplinary matrix)'과 '예제(exemplar)'로 재정의한다. 패러다임의 본질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연습문제를 풀며 몸에 익히는 구체적인 전형(c.f.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재정의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것이 패러다임이고,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자들이 공동체'라는 순환 논리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
 
더 야심 찬 시도는 1983년 논문에서 등장한다. 그는 공약불가능성을 언어학적으로 재해석하며, 번역의 불변항을 개별 단어가 아닌 어휘적 분류 구조의 동형성(homology of lexical structure)'에서 찾으려 했다. 개념들이 맺고 있는 그물망의 구조가 다르면 세계 자체가 달라지며, 이때 소통은 단절된다는 논리다(Kuhn, 1983, p. 683). 그는 죽기 전까지 이 아이디어를 언어 습득 이론과 연결하는 미완성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필연적인 패착을 안고 있다. 쿤은 '번역'은 안 되더라도 '해석(언어 습득)'을 통해 타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역사가가 구 패러다임의 언어를 해석해내는 순간, 그는 두 체계를 동시에 운용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bilingual)'가 된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두 세계가 대조되고 설명되는 순간, 쿤이 그토록 고수했던 '공약불가능성(비교 불가능성)'은 논리적 기반을 잃는다. 쿤의 언어철학적 전환은 비판을 피하기 위해 방어선을 뒤로 물린 것에 불과하며, 결국 자신이 세운 가장 거대한 기둥을 스스로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론을 대신하여

쿤의 책은 약점이 많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순환적이고 역사 서술이 단순화되어 있으며 공약불가능성 테제가 상대주의의 문을 열어놓더라도, 과학이 순수 논리의 자기 전개가 아니라는 쿤의 핵심 직관은 타당하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실험실 현실을 지나치게 이상화했고, 쿤의 공동체 사회학은 그 이상화에 균열을 냈다.
 
쿤을 읽는 올바른 방법은 두 단계다. 먼저 그가 무너뜨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다음으로 그가 세운 것이 얼마나 견고한지 시험한다. 이 글은 두 번째 단계였다.
 
과학철학의 이 논쟁이 지금도 중요한 이유는 하나다. 우리는 '과학적'이라는 말을 여전히 권위의 마개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Kuhn, T. S. (1962/2012).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Kuhn, T. S. (1983). "Commensurability, Comparability, Communicability." PSA: Proceedings of the Biennial Meeting of the Philosophy of Science Association, 2, 669–688.

더 읽어보면 좋은 책들

 
Kuhn, T. S. (2000), The Road Since Structure: Philosophical Essays, 1970-1993, with an Autobiographical Interview.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opper, K. (1934/2002).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Routledge.
Lakatos, I. (1978/2020).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m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Feyerabend, P. (1975/2010). Against Method. Verso.
Weinberg, S. (2015/2016). To Explain the World: The Discovery of Modern Science. HarperCollins.
Masterman, M. (1970). "The Nature of a Paradigm." In I. Lakatos & A. Musgrave (Eds.),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