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식물을 키울 여유가 없다가 간만에 새 식구를 여럿 들이게 되었다. 어제 볼일이 있어 양재동에 가는 김에 겸사겸사 꽃시장에 들러 허브 삼총사를 사왔다. 페퍼민트, 잉글리시 라벤더, 커먼 타임. 왜 하필 이 셋이냐. 페퍼민트는 생잎을 온수에 우려먹을 생각이고, 타임은 우려 마시거나 고기 요리 잡내 제거용이다. 라벤더는 지극히 개인 취향이다. 저렇게 조그마한 녀석으로 뭘 하기는 힘들다. 그냥 향이 좋아서 샀다.
허브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도 길러 보았고, 많이도 죽여 봤다. 이번에는 오래 키워보자는 일념 하에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간의 실패를 복기해 보니 높은 확률로 과습이 아닌가 싶었다.
무엇이 지중해산 허브들을 과습으로 죽이게 하느냐. 빈번한 물주기, 통풍 부족, 일조량 부족, 이 세 가지가 보통 맞물려 돌아간다. 곰팡이는 결과일 뿐이다.
빈번한 물주기만이 원인이냐 하면 반만 맞다. 비가 자주 오는 지방이라고 다 썩어버리지는 않으니까. 내가 간과했던 것이 토질이었다.
유감이지만 한국 중부지방의 기후와 토양은 지중해와는 정반대다. 지중해의 여름은 고온 건조하다. 아열대 고기압대가 여름철에 북상하면서 하강기류를 형성하고, 이것이 강수를 억제한다. 사하라와 지중해의 건조함이 같은 기압계의 산물인 셈이다. 연안 토양은 비옥함과는 거리가 먼 석회질 약알칼리다. 반면 한국은 화강암 풍화토 위주의 약산성. 출발점부터 다르다.
물론 지중해의 겨울은 우중충하고 비도 자주 오지만, 배수가 잘 되니 별 문제가 없다. 허브가 한국에서 노지월동을 하는 곳이 강원 동해안, 남해안, 제주도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통점은 바람, 온난함, 그리고 배수. 수도권 아파트 베란다는 이 세 가지를 전부 갖추지 못했다. 녀석들에게는 최악의 환경이다. 그래, 극한의 환경에서 버텨야 강인한 종자가 되지 (개소리).

라벤더가 죽는 패턴에 대해 따로 조사해 보았다. 라벤더도 품종에 따라 편차가 있는데, 잉글리시가 그나마 과습과 더위에 버티는 편이다. 프렌치와 함께 과습에 가장 취약한 품종들이 있으니, 처음 들일 때는 잉글리시가 무난하다. 어제 잉글리시를 들인 것도 그런 이유다.
죽는 패턴 자체는 단순하다. 속흙이 젖어 있음에도 물을 주다 골로 보내거나, 습한 기후에 비실비실한 것을 영양 부족으로 오해해 비료를 줘서 골로 보내거나, 상토 단일로 화분을 채워 물빠짐이 막히거나.
통풍이 안 되는 환경에서는 이파리끼리 부딪히기만 해도 곰팡이균에 속수무책이고, 일조량이 부족하면 가지 안쪽까지 빛이 닿지 않아 같은 결과가 된다. 경로는 달라도 종착지는 하나다. 풍성한 라벤더를 보고 싶으면 노지 허브농원으로 가는 걸로.
그래도 라벤더가 커먼 로즈마리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로즈마리는 노지 아니면 실내에서 백이면 백 흰가루병으로 푸른별로 떠난다. 심지어 본고장에서도 실내에서 곰팡이로 죽는다. 어떻게 아냐고? 직접 해 봤다. 드루이드도 커먼 로즈마리는 못 살릴 거다. 줄기가 땅을 기는 크리핑 품종은 쉽다고들 하니, 언젠가는 도전해볼 생각이다.
라벤더와 타임은 오늘 아침 분갈이를 끝냈다. 새 환경에 적응하도록 이틀에서 사흘 기다렸다 하라고 하는데, 그 정도도 못 버틸 거면 그게 너희들 운명인 것이다.
라벤더는 모종 10센티짜리 화분보다 사방 2센티 여유가 있는 마데 인 이딸리 토분에 식재했다. 너무 큰 화분에 심지 말라는 것이 지피티와 제미나이의 이구동성인데, 흙이 머금은 수분이 식물의 역량을 초과한다나 뭐라나.
흙은 소립 마사토와 분갈이용 상토를 6대 4로 맞췄다. 장마철의 찜통 베란다를 생각하면 오버를 좀 할 필요가 있다. 목표는 장마철 내내 물을 거의 끊다시피 하는 것. 마사 비율이 높으니 물을 줬더니 바로 구멍으로 콸콸 나왔다. 배합은 잘 한 모양이다.
상토를 최대한 털어내기 위해 양동이에 물을 채우고 그 속에서 살살 흔들어 턴 다음 식재했다. 잔뿌리가 다치면 큰일날 식물이므로 이 방법이 안전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삽목 2본이 하나의 포트에 들어있던 것이다. 억지로 뜯어내다 둘 다 죽을 수 있으니 그냥 동거하렴.
처음 살 때는 꽃이 피어있었는데, 모두 쳐냈다. 개인적으로 허브건 다른 초본식물이건 꽃이 안 핀 것을 선호하기도 하고, 새 화분에 적응해야 하는데 꽃에 에너지를 쏟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다음 타자 커먼 타임은 한때 다육이가 있었던 도기 화분에 식재했다. 흙 배합은 마사와 상토 5대 5. 이녀석도 과습을 싫어하니 라벤더와 비슷하게 갔다. 식재 후 이발도 깔끔히 했다. 자른 가지는 찻잎으로.
이녀석은 뿌리가 모종 포트에 꽉 차다 못해 삐져나온 상태였다. 아이고야. 삐져나온 뿌리를 포함해 하단부 4분의 1을 잘라냈는데, 잘 자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렇게 팔리는 모종을 보면 참 살아있는 게 용하다.
세번째 타자는 페퍼민트. 약간 웃자란 상태이기에 과감히 쳐냈다. 민트는 좀비 같은 녀석이니 알아서 잘 살아남을 것으로 믿는다.

문제는 옆에 준비해 둔 커다란 사각화분이다. 민트의 새 집이 되었어야 할 이 화분에 뿌리파리로 의심되는 날벌레가 꼬여있다. 흙 표면을 얼쩡거리는 녀석들을 보니 유력하다. 알도 깠을 것이다.
일단 반투명 비닐로 화분을 밀폐했다. 비닐 안쪽에 햇빛이 모이면 토양 온도가 올라가 유충을 열로 죽이는 방식, 토양 훈증이다. 식물이 없는 빈 화분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일주일 후에는 과산화수소수 3% 원액을 물과 1:4로 희석해 관주할 예정이다. 1차에서 살아남은 유충은 2차에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쯧. 미안하게 되었다. 페퍼민트, 일주일 간 임시 거처에서 버텨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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