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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인용되지만 읽히지 않는 아렌트 — 1편: "악의 평범성"은 인간 본성에 대한 진단이 아니다

by pragma 2026. 5. 22.

오늘날 우리에게는 널리 통용되는 한나 아렌트라는 모습이 있다. 이는 기존의 논쟁 구도에 매끄럽게 맞아떨어지고, 우리가 던져온 질문에 답을 내놓으며, 우리의 직관을 확인시켜 주는 그런 아렌트다.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적 참여를 옹호하기 위해, 공동체주의자들은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를 공격하기 위해, 진보주의자들은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기 위해, 그리고 냉전주의자들은 나치와 스탈린주의를 싸잡아 비난하기 위해 저마다의 아렌트를 동원한다. 하지만 이렇게 알려진 아렌트의 모습은 거의 모든 핵심적인 지점에서 사실과 다르다.

 

이러한 오해들은 단순한 왜곡이나 지엽적인 해석상의 다툼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오류다. 독자들은 아렌트가 기존의 이론적 틀을 해체하고 질문을 원점에서 다시 세우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자신들의 틀을 아렌트에게 끈질기게 투영해 왔다. 그 결과 아렌트는 끊임없이 인용되지만, 제대로 이해되는 경우는 드물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오해들이 하나의 정설로 굳어버린 탓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단순히 게으른 독해와 싸우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투영을 아렌트의 실제 견해로 착각해 온 방대한 2차 문헌의 무게에 맞서야만 한다.

 

이 에세이 시리즈는 아렌트가 오용되는 네 가지 패턴을 검토하고, 원전(primary texts)에 근거하여 이를 바로잡은 뒤, 마지막으로 무엇이 그의 사상을 그토록 수용하기 어렵게 만드는지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1편에서는 그중 가장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오독, 즉 '악의 평범성'에 대한 오해를 다룬다.


1963년,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 보고서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용어를 제시했을 때, 철학자의 의도는 악이란 일상적인 것이라거나, 조건만 맞으면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또한 홀로코스트가 관료 기제에 의해 증폭된 보편적 인간 심리의 산물이라는 주장도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생경하며, 철학적으로도 대단히 까다로운 지점에 맞닿아 있었다.

 

대중적 수용 과정에서 이 문구는 "특정한 상황에 놓이면 누구든 참혹한 범죄에 가담할 수 있다"는 식의 사회학적 테제로 박제되었다. 이런 독법은 아렌트를 도덕적 억제력을 압도하는 상황적 압박을 경고한 심리학자, 즉 스탠리 밀그램의 선구자 정도로 격하시켰다. 반대편의 비판자들은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다거나 희생자들을 향한 감정적 연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양 진영 모두 아렌트의 논의를 인간 본성이나 상황 심리에 대한 주장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 오독은 너무나 견고하게 자리 잡아 이제는 하나의 정설처럼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재판 현장에서 아렌트가 목격한 것은 사회학적으로 뻔한 현상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당혹스러운 실체였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가학적이지도, 직업 관료 이상의 광신적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깊은 의미에서의 반유대주의자조차 아니었다. 아렌트가 발견한 것은 그의 표현대로 "기묘할 정도로 지극히 진정한, 사유함의 무능(a curious, quite authentic inability to think)"이었다.¹ 이는 그가 엄격히 구분했던 '어리석음(stupidity)'도, 사악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특정한 정신적 기능이 구체적으로 결여된 상태였다.

 

이는 심리학적 관찰이 아닌 인식론적 관찰이다. 아렌트의 주장은 사유와 도덕적 주체성 사이의 관계를 파고든다. 1971년 강연인 "사유와 도덕적 고려(Thinking and Moral Considerations)"에서 악의 평범성을 어떤 "이론이나 교리(theory or doctrine)"가 아닌, "지극히 사실적인 현상(quite factual)"으로서 언급했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이 현상은 본인으로 하여금 '권리 문제(quaestio juris)', 즉 어떤 철학적 권리로 그 개념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² 아렌트는 이 강연에서 세 가지 명제를 통해 그 논거를 펼친다.³

 

첫째,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이 사유하는 능력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사유는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보편적 기능이어야 한다. 따라서 아이히만에게서 나타난 판단력의 마비는 예외적인 광기가 아니라 보편적 능력의 부재였음을 의미한다.

 

둘째, 사유가 도덕적 규범이나 계율, 준칙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유는 칸트가 말했듯 스스로 도출한 결과물조차 고정된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natural aversion)"를 지닌다. 직관적으로 풀어 말하자면, 사유는 "전날 밤에 완성한 것을 매일 아침 해체하는(undoes every morning what it had finished the night before)" 작업이다.⁴ 이는 사유 없이 규범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이 그 규범이 뒤바뀔 때 가장 취약해짐을 시사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꼬집는다. "기존의 규범을 더 굳게 붙들고 있었던 사람일수록, 새로운 규범에 자신을 동화시키려는 열망도 더 크기 마련이다(The faster men held to the old code, the more eager will they be to assimilate themselves to the new one)".⁵ 규범의 뒤집힘(reversal)이 이토록 용이하다는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사유의 기능이 마비되었음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셋째, 사유는 정의, 아름다움, 용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루기에,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세계(현상계)에서는 구조적으로 "부적합한(out of order)" 상태에 있다. 이것이 사유가 항상 주변부에 머무는 이유이자, 그 정치적 유의미함이 오직 비상사태에서만 빛을 발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아이히만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유하려는 성향뿐만 아니라, 아렌트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Critique of Judgement)』에서 도출한 확장된 사유 방식(enlarged mentality, erweiterte Denkungsart)조차 부재했다.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확장된 사유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상상력이 '방문'하도록 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To think with an enlarged mentality means that one trains one's imagination to go visiting)". 즉, 타인의 의견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위치와 조건, 관점을 세계를 바라보는 관측점으로 삼아 사유 속에서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것을 뜻한다.⁶

 

아렌트는 이것이 공감(empathy)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비판적 사고의 핵심은 타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거창한 공감에 있는 것이 아니다(The trick of critical thinking does not consist in an enormously enlarged empathy through which one can know what actually goes on in the mind of all others)".⁷ 확장된 사유는 타인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서 있는 곳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구분은 아렌트를 향한 흔한 오독의 문제와 직결된다. 아이히만의 희생자들에게 냉담하다고 비난했던 비평가들은 공감을 요구했다. 즉 가해자를 심판하기보다는 피해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에 함축되어 있고,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과의 서신에서도 일관된 아렌트의 답변은, 감정을 판단으로 대체하는 바로 그 행위야말로 그가 진단하고자 했던 실패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 과거를 직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판단하기 시작하고 그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I do believe that we shall only come to terms with this past if we begin to judge and to be frank about it)".⁸ 판단에 대한 고집은 아렌트의 도덕적 책무였다. 아이히만은 결코 '방문'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희생자들의 입장에 서보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종류의 사유를 할 능력이 없었다. 아이히만을 비판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렌트의 분석을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똑같은 실패를 저질렀다. 그들은 성역 없는 판단(judgement)을 거부하고, 고된 과업(판단)을 미완으로 남겨두는 정서적 반응에 안주했다.

 

사유가 가져다주는 해방 효과의 부산물은 판단이다. 즉, "학습된 일반 규칙 아래 개별 사례를 귀속시키지 않고도, 그 자체로 판단하는 능력(the faculty to judge particulars without subsuming them under those general rules which can be taught and learned until they grow into habits)"이다.⁹ 판단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 중 가장 정치적인 것(the most political of man's mental abilities)"으로, 어떠한 기성 규칙 없이 오직 개별적인 사안에 직면하여 "이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자 용기이다.¹⁰ 이것이 바로 아이히만에게 결여된 것이었으며, "악의 평범성"이 평범한 인간 심리에 대한 사회학적 테제가 아니라 인지 능력의 실패에 관한 인식론적 테제인 이유이다.

 

full text: 2026.04.29 - [Philosophy] - [철학 #01] 아렌트 제대로 알고 쓰기

 

[철학 #01] 아렌트 제대로 알고 쓰기

오늘날 우리에게는 널리 통용되는 한나 아렌트라는 모습이 있다. 이는 기존의 논쟁 구도에 매끄럽게 맞아떨어지고, 우리가 던져온 질문에 답을 내놓으며, 우리의 직관을 확인시켜 주는 그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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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Hannah Arendt, "Thinking and Moral Considerations: A Lecture," Social Research 38:3 (Autumn 1971) [hereafter TMC], opening section.
  2. TMC, section I. The quaestio facti / quaestio juris framing draws on Kant, Akademie Ausgabe, Vol. XVIII, No. 5636, cited directly by Arendt.
  3. TMC, section I (concluding three propositions).
  4. Ibid. Arendt cites Kant's posthumously published notes, Akademie Ausgabe, Vol. XVIII, Nos. 5019 and 5036.
  5. TMC, section II.
  6. Hannah Arendt,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ed. Ronald Bein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hereafter LK], Part One, Sessions 7–8.
  7. Ibid.
  8. Ronald Beiner, "Interpretive Essay," in LK, §3 "Judging Eichmann." Arendt's reply to Scholem is in the Postscript to the second (1965) edition of Eichmann in Jerusalem.
  9. TMC, section III (concluding passage).
  10.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