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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인용되지만 읽히지 않는 아렌트 — 3편: 공화주의자도 공동체주의자도 아닌 아렌트, 그리고 『전체주의의 기원』의 오독

by pragma 2026. 5. 22.

이 글은 한나 아렌트의 오독 패턴을 네 편에 걸쳐 검토하는 시리즈의 세 번째 편이다. 앞선 두 편에서는 '악의 평범성'과 공/사 구분에 대한 오해를 다뤘다. 이번 편에서는 아렌트를 공화주의·공동체주의 전통으로 흡수하려는 시도와, 『전체주의의 기원』을 냉전기 양비론으로 독해하는 오류를 함께 검토한다.

 

아렌트는 공화주의자도, 공동체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아니다

 

아렌트를 시민 공화주의자나 공동체주의자로 읽는 것은 꽤 그럴듯해 보인다. 평생 정치 참여를 가치 있게 여겼고, 정치가 경제적 논리로 환원되는 것을 비판했으며, 진정한 공적 공간의 상실을 애석해했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어휘는 필립 페티트(Philip Pettit),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와 충분히 겹치기에, 그들의 사상 체계 안으로 아렌트를 끌어들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러한 동화(assimilation) 시도는 잘못된 것이며, 그 반박 근거는 『인간의 조건』 2장에 명시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실 문장 자체가 워낙 확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오독이 그토록 끈질기게 살아남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치는 단순히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중세의 신도들의 사회든, 로크의 재산 소유자들의 사회든, 홉스의 끊임없는 소유욕에 매몰된 사회든, 마르크스의 생산자들의 사회든, 우리 시대의 직장인들의 사회든, 혹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의 사회든 말이다(Under no circumstances could politics be only a means to protect society—a society of the faithful, as in the Middle Ages, or a society of property-owners, as in Locke, or a society relentlessly engaged in a process of acquisition, as in Hobbes, or a society of producers, as in Marx, or a society of jobholders, as in our own society, or a society of laborers, as in socialist and communist countries).

이 문장은 결정적이다. 아렌트는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정치철학의 모든 주요 전통을 기각한다—모두가 정치를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로크에게 정치는 재산을 보호하는 수단이다. 홉스에게 정치는 생존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마르크스에게 정치는 사회화된 생산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샌델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정치는 구성된 자아(constituted self)를 표현하고 유지하는 수단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정치는 도구적이다—곧 근본적인 무언가를 위해 복무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아렌트의 입장은 정반대다. 정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유의 실현(actualization)이다. 자유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가 정치 영역에서 행사하는 어떤 권리 같은 것이 아니다. 자유는 오직 평등한 자들 사이에 나타나, '나타남의 공간'에서 말하고 행위하는 그 '활동' 속에만 실재한다. 아렌트가 "자유롭다는 것과 행위한다는 것은 동일하다(To be free and to act are the same)"고 선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¹ 자유는 정치적 행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그것에 선행하지도 않는다. 자유가 곧 정치적 행위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의미하는 바—그리고 아렌트의 반(反)도구주의에 대한 설명에서 자주 누락되는 지점—는 『혁명에 대하여(On Revolution)』 3장에 제시되어 있다. 미국 건국 시조들의 경험과 그들이 마을 집회나 회의에 참여했던 것을 묘사하며,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쓴다. "미국인들은 공적 자유란 공적인 업무에 지분을 갖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결코 짐이 아니라, 공적으로 그 일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행복감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the Americans knew that public freedom consisted in having a share in public business, and that the activities connected with this business by no means constituted a burden but gave those who discharged them in public a feeling of happiness they could acquire nowhere else)."² 여기서 등장하는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은 정치 제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 참여라는 행위 그 자체에서 오는 직접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훌륭한 통치에 의해 생산될 수 없고, 비지배(non-domination)에 의해 확보될 수 없으며, 권리에 의해 보장될 수도 없다. 오직 공적인 업무를 공유하는 행위 속에만 존재한다.

 

이 지점이 필립 페티트 같은 시민 공화주의자들이 아렌트를 왜곡하지 않고서는 수용할 수 없는 대목이다. 페티트는 자유를 '비지배'—임의적인 간섭이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이는 어떤 행위 이전부터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받는 구조적 속성이다. 하지만 아렌트에게 이것은 자유를 위한 조건일 뿐, 자유 그 자체는 아니다. 공화주의 전통 역시 자유주의와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자유를 '행위'가 아니라 '정치 이전의 속성'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적 접근 역시 결만 약간 다를 뿐 똑같이 잘못된 방향을 짚고 있다. 샌델과 매킨타이어는 자유주의적 자아란 환상일 뿐이며, 오직 공동체, 전통, 관습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자아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장에는 관심이 없다. 나타남의 공간은 우리가 이미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곳이며, 종종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조차 몰랐던 모습에 놀라게 되는 장소다.³ 아렌트에게 정치적 정체성은 정치적 행위에 선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로부터 출현(emerge)한다.

 

아렌트의 저서에서 구체적인 제도적 처방을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의도된 누락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철학자의 원칙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행위는 "언제나 관계를 설정하며, 따라서 모든 한계를 밀어내고 모든 경계를 가로지르는 내재적인 경향을 갖는다(always establishes relationships and therefore has an inherent tendency to force open all limitations and cut across all boundaries)."⁴ 특정한 정치적 결과를 겨냥해 제도를 설계하는 것은 행위를 '제작(fabrication)'과 혼동하는 것이다. 이는 죽어있는 재료를 정해진 목적에 맞추어 빚어내는 장인의 논리다. 정치가 이러한 제작의 모델을 따르는 순간, 그것은 폭정(tyranny)이 된다.

 

평의회 체제(council system)에 대한 아렌트의 찬탄은 이 논리를 정확히 반영한다. 프랑스 혁명 중에 자생적으로 발생한 평의회들, 러시아의 소비에트,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사례들은, 그것이 어떤 우월한 제도적 모델이라서 훌륭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현대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출현한, 즉 "혁명의 과정 자체에서 구성되고 조직된 자유를 위한 새로운 공적 공간(a new public space for freedom which was constituted and organized during the course of the revolution itself)"이 나타난 유일한 사례들이었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⁵ 그것들은 아렌트적 의미에서 순수한 정치적 행위였다. 정당 체제가 이들을 파괴한 사실은 설계의 미흡함을 증명하는 근거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 그 자체에 내재된(constitutive) 숙명적인 취약성을 입증할 뿐이다.

 

결국 아렌트를 읽고 어떤 정책적 의제를 도출해 내려 한다면, 우리는 아렌트 철학의 정수를 이미 놓친 셈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냉전기의 양비론적 주장이 아니다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이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즉각 냉전 논리를 대변하는 텍스트로 읽혔다. 나치 독일과 스탈린주의 러시아는 도덕적으로 동등하며, 따라서 서구 자유주의의 진영이 이 두 체제에 반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논거로 쓰인 것이다. 좌파 비평가들은 이것이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하나로 뭉뚱그리는 것이라며 반발했고, 우파 비평가들은 같은 이유로 열광적으로 수용했다. 하지만 두 진영 모두 아렌트가 정작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이 책은 두 체제를 나란히 비교하는 역사서가 아니다. 홀로코스트와 굴라그(Gulag)가 똑같이 악하다거나,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동일한 정치적 성격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논지는 철저히 구조적이고 현상학적이다. 즉, 두 정권 모두 인류 역사에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구체화했으며, 그 새로움은 도덕적 동등성이나 역사적 인과 관계에 대한 질문과는 별개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증이 가장 정교하게 갈무리된 대목은 1958년 개정판에 추가된 13장, 「이데올로기와 테러」이다. 아렌트는 구조적 근거를 바탕으로 전체주의를 이전의 모든 지배 형태와 구분한다. 전통적인 참주는 공포를 동력 삼아 통치한다. 정치적 삶은 억압하되 사적 영역은 대체로 온전하게 남겨두는 식이다. 그래서 참주에게 처벌받으려면 최소한 참주의 적이어야 했다. 전체주의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다.

 

그 구조적 변화를 상징하는 지표가 바로 '혐의자(suspect)'에서 '객관적 적(objective enemy)'으로의 전환이다. 참주 정권하에서 비밀경찰은 숨겨진 적들, 즉 위험한 생각이나 행동으로 위협이 되는 개인들을 찾아낸다. 여기에는 도발, 감시, 그리고 실제 혹은 의심되는 반대자들을 식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체주의에서 적의 범주는 개인의 행동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데올로기적 선언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후자(객관적 적)는 정부의 정책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지,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개인의 욕구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the latter is defined by the policy of the government and not by his own desire to overthrow it)."⁶

 

나치즘 치하의 유대인이나 스탈린주의 치하의 전직 쿨락(부농)은 의심스러운 짓을 해서 잡혀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행위를 저지르기도 전에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이미 '객관적 적'으로 낙인찍혔다. 이 논리는 더 나아가 '가능한 범죄(possible crime)'라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실제로 한 일이나 의도한 일이 아니라, 역사나 자연의 법칙상 '그가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 때문에 처벌받는 것이다.⁷ '의심스러운 자'에서 '객관적 적'을 거쳐 '가능한 범죄'로 이어지는 것, 이것은 독일이나 러시아 문화에 대한 역사적 일반화가 아니라 구조적인 전개 과정이다.

 

전체주의가 왜 전대미문의 지배 형태인지를 이해하는 또다른 열쇠는 '고립(isolation)'과 '외로움(loneliness)'에 대한 구분이다. 고립은 공적 영역—타인과 함께 행위하는 공간—을 파괴하지만 사적 영역은 남겨둔다. 그래서 고립된 사람도 여전히 일하고, 제작하며, 내면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외로움은 더 근원적이다. 그것은 "세계에 전혀 속해 있지 않다는 경험(the experience of not belonging to the world at all)"⁸이며, 자아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즉 스스로의 경험 및 사유 능력과도 단절된 상태다. 전체주의가 거둔 독보적인 성취는 단순한 고립을 넘어 이 근원적인 외로움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내면적 저항이 싹틀 만한 자아 그 자체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이 비극을 완성하는 장치가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테러'다. 테러는 "고립된 인간 군상을 하나로 압착하여(presses masses of isolated men together)" 사람들 사이의 빈틈을 지워버린 운동 속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에 단 하나의 전제로부터 철의 논리로 진행되는 이데올로기적 사고가 더해지면 "실재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ruins all relationships with reality)."⁹ 이 둘이 결합하여 아렌트가 전체주의 통치의 이상적인 피지배자로 지목한 존재를 만들어낸다. 그는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의 구분, 그리고 참과 거짓의 구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the distinction between fact and fiction and the distinction between true and false no longer exist)" 사람이다.¹⁰ 그런 사람은 단지 정치적으로 억압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적 판단에 필수적인 '현실 검증 능력'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적 분석은 나치 독일과 스탈린주의 러시아 모두에게 들어맞는다. 두 체제 모두 이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교는 구조적인 것이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역사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책이라고 규정하며, 역사적 책임이나 인과 관계를 따지기보다 새로운 정치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결정(crystallization, 여러 요소가 결합하여 하나의 형태를 갖춤)'의 과정에 주목했다.¹¹

 

따라서 아렌트에게 '도덕적 양비론'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구조적 분석을 역사적 서술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실책이다. 두 정권이 새로운 지배 형태를 공유했다고 해서 그 죄의 무게나 역사적 책임, 혹은 외교적 가치가 같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아렌트가 던진 질문과는 완전히 다른 층위의 문제들이다. 그녀의 구조적 분석을 냉전기식 양비론으로 격하시킨 비평가들은, 정교한 현상학적 탐구 위에 자신들의 정치적 프레임을 덧씌우고 있었을 뿐이다.

 

full text: 2026.04.29 - [Philosophy] - [철학 #01] 아렌트 제대로 알고 쓰기

 

[철학 #01] 아렌트 제대로 알고 쓰기

오늘날 우리에게는 널리 통용되는 한나 아렌트라는 모습이 있다. 이는 기존의 논쟁 구도에 매끄럽게 맞아떨어지고, 우리가 던져온 질문에 답을 내놓으며, 우리의 직관을 확인시켜 주는 그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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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Hannah Arendt, Between Past and Future (Viking Press, 1961) [hereafter BPF], ch. IV ("What Is Freedom?").
  2. Hannah Arendt, On Revolution (Viking Press, 1963) [hereafter OR], ch. III ("The Pursuit of Happiness").
  3.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hereafter HC], ch. V, §24.
  4. HC, ch. V, §25.
  5. OR, ch. VI ("The Revolutionary Tradition and Its Lost Treasure").
  6.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edition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3) [hereafter OT], ch. XII ("Totalitarianism in Power").
  7. Ibid.
  8. OT, ch. XIII ("Ideology and Terror: A Novel Form of Government").
  9. Ibid.
  10. Ibid.
  11. Hannah Arendt Papers, Library of Congress: "Totalitarianism, the Inversion of Politics" (1958 ref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