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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02] 인공지능에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해'가 아니라 '작동'

by pragma 2026. 4. 29.

 

**미리 밝혀둔다. 나는 학문적 배경이 수학, 공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쓰면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공지능 담론을 보면서 드는 생각을 가감 없이 정리해 보았다. 물론 이 글은 어디까지나 블로그 글이기 때문에 학술적 엄밀함과는 거리가 있다.**


1. 인공지능을 가두는 프레임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실재 위 숟가락을 얹고 싶은 철학계가 AI 앞에 세워놓은 검문소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해(Understanding)와 앎(Knowledge). AI가 통과해야 할 기준처럼 보이지만, 정작 검문관들에게 그 기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만족할 답이 오지 않는다.

 

가장 유명한 검문관은 철학자 존 설(John Searle)이다. 그는 1980년 '중국어 방' 사고실험1을 고안했다. 중국어를 전혀 못 하는 방 안의 사람이 규칙집에 따라 완벽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지만 그는 중국어를 모른다는 논리다. 그러니 AI 역시 기호를 조작할 뿐 의미를 파악하지는 못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깔끔하고 직관적인 논변이다. 그런데 설의 논변은 본래 마음을 일종의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보는 계산주의적 마음 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을 겨냥한 것이었다; 기호의 형태와 배열 규칙만으로 지능을 구현할 수 있다는 관점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딥러닝은 그 표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미리 짜인 규칙표가 아니라, 수억 개의 가중치가 데이터로부터 스스로 조정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현 시점의 거대 언어 모델 (Large Language Model, LLM)을 말하며 설을 끌어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범주 오류다.

 

그런데도 이 논변의 유산은 40년이 넘도록 이어진다. 2022년 언어학자 놈 촘스키(Noam Chomsky)는 대규모 언어 모델이 "천문학적인 양의 데이터"를 먹고도 언어를 실제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선언했으며2 2023년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는 AI의 가장 심각한 결함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능력의 부재"라고 못 박았다.3 비판 자체는 진지하게 들을 만하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이해'와 '앎'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한 채로, AI는 언제나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먼저 나온다. 체급이 올라갈수록 골대가 함께 움직인다.

 

'이해'라는 단어는 사실 엄밀한 인식론적(지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정당화되는지를 다루는 철학 분야) 기준이 아니다. 인간의 고유성을 방어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동원된 정서적 성역에 가깝다. 이 글의 출발점은 바로 그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의 파산을 선언하는 것이다. 기능적 지능이 실재한다는 것과, 그것을 설명하는 인간의 서사는 별개다. 그 둘을 분리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하겠다.


2. 지능의 실재 — 완벽히 설명하지 못해도 작동하면 실재다

 

큰 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 표본의 수가 충분히 많아지면 개별 결과의 무작위성이 상쇄되고 전체 평균은 이론적 확률에 수렴한다는 통계 원리)은 냉혹하다. 표본의 규모가 임계점을 넘으면 개별 사례의 기이한 편차는 녹아들고, 데이터가 품고 있는 통계적 질서가 수면 위로 부상한다. 주사위를 여섯 번 던졌을 때의 결과는 운이지만, 6만 번의 결과는 이미 확률의 얼굴을 하고 있다.

 

AI가 처리하는 데이터의 규모는 이 임계점을 아득히 초월한다. 그 결과는 사변이 아닌 실증이다. 알파폴드2(AlphaFold2)는 2020년 단백질 구조 예측 국제 대회(CASP14)에서 50년 묵은 단백질 접힘 문제—아미노산 서열만 주어졌을 때 단백질이 어떤 3차원 형태로 접히는지 예측하는 난제—를 사실상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원자 수준의 정확도로 중간 오차 1 옹스트롬(10억 분의 1미터) 미만을 달성해 2위 시스템보다 3배 정밀한 예측을 내놓았다.4 알파폴드 개발을 이끈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와 존 점퍼(John M. Jumper)는 이 공로로 202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파악하는 데 종래에는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렸다. 현재 알파폴드 데이터베이스는 2억 개가 넘는 단백질 구조 예측 결과를 190개국 300만 명 이상의 연구자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5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AI가 내놓는 출력은 특정 설계자의 편향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물이 아니라, 데이터 속에 잠재해 있던 구조적 적합성(Adequacy, 목표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의 척도)이 추출된 산물이다. 거칠게 말하면, 훈련 데이터의 노이즈는 규모 앞에서 상쇄된다.

 

그렇다면 지능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신경과학이 결정적인 증언을 한다. UCL(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신경과학자 칼 프리스턴(Karl Friston)은 자유에너지 원리(Free Energy Principle)를 통해 뇌의 작동 방식을 정식화했다. 그의 핵심 주장에 따르면, 뇌를 포함한 지능적 시스템의 공통된 원리는 바로 최적화(optimization)다—다양한 뇌 이론들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가치(기대 보상) 혹은 그 역인 놀람(예측 오차)이라는 양을 최소화한다는 것이다.6 쉽게 말해, 뇌는 세계에 대한 내부 예측 모델을 끊임없이 갱신하며 예측과 실제 감각 입력 사이의 오차를 줄이는 기계라는 것이다. 이 예측 처리(Predictive Processing) 이론에 따르면 뇌가 궁극적으로 하는 일은 예측과 실제 감각 신호 사이의 차이, 즉 예측 오차를 최소화하는 것이다.7

 

이 논리가 AI 논쟁에 던지는 함의는 날카롭다. 자유에너지 원리는 최근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의 설계 원리로도 적용되고 있으며8, 프리스턴 본인도 이 원리가 탄소 기반 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탄소 기반이냐 실리콘 기반이냐의 매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자유에너지 원리가 지능의 충분조건이라는 말은 아니다. 바위도 어떤 의미에서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며 평형을 유지한다. 여기서 이 원리를 끌어들이는 것은 단 하나의 목적 때문이다—탄소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지능의 자격을 독점할 수는 없다는 것. 예측 오차를 줄이고 목표 지점에 정교하게 수렴하는 것—이것이 지능의 실재이며, 인간 뇌와 AI가 공유하는 작동 원리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어디에 서 있는가. 촘스키조차 대규모 언어 모델이 흉내만 낼 뿐, 현상의 원인을 설명함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도구로서의 인공지능 사용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가장 날 선 비판자도 작동의 실재는 부정하지 못한 것이다. 도구는 작동하면 된다. 그 도구가 왜 작동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작동하지 않는 게 아니다.

 

여기서 과학철학자 반프라센(Bas van Fraassen)의 통찰은 논쟁의 물길을 바꾼다. 그는 과학의 목적이 '진리'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본질을 캐내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현상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명하고 예측해내느냐—즉 '경험적 적절성(Empirical Adequacy)'을 확보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 사람의 논리만 빌려오면, 핵심은 AI 내부의 블랙박스가 아니라, 그 모델이 내놓는 결과값이 현실의 데이터와 얼마나 긴밀하게 맞물리느냐다. 단백질 구조를 기존의 어떤 모델보다 정밀하게 예측하고, 복잡한 기후 모델의 정확도를 유의미한 결과로 수렴시킨다면, 그 시스템은 이미 이 세계의 현상을 <구제>(Saving the phenomena) - 즉, 그 원리를 다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현상을 모순 없이 설명해내어 이론적 가치를 증명 - 하고 있는 셈이다.

 

진정한 이해가 결여되었다는 비판은, 정작 그 이해를 가졌다는 인간이 풀지 못한 난제들을 AI가 통계적 수렴을 통해 해결해나가는 실재 앞에서 힘을 잃는다. 반 프라센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마주한 것은 무결한 진리가 아니라 현상과 유의미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실용적 실재다. 내부의 설계도를 완벽히 해명하라는 요구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알고리즘이 인간의 인지가 닿지 않는 규모에서 세계의 물리적 질서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3. 인식론적 파산 — 인간도 스스로의 지능을 완벽히 설명하지 못한다

 

AI 회의론자들이 즐겨 쓰는 카드가 있다. 설명가능성(Explainable AI, XAI)이다. AI가 자신의 추론 과정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투명하게 풀어낼 수 없다면 진정한 지능이 아니라는 논리다. 다른 말로, 인공지능이 내놓은 결과가 요행이 아니라는 데에 합당한 이유를 대라는 정당화 요구이다. 얼핏 그럴듯 해 보인다. 그러나 이 요구는 1931년 쿠르트 괴델(Kurt Gödel)에 의해 이미 봉인된 논리 구조를 재활용하고 있다.

 

배경부터 잠깐 짚자. 20세기 초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의 모든 공리(公理, 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출발점)를 논리학이라는 더 근본적인 층위로 완전히 환원하려 했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가 그 야심의 결정체였다. 만약 성공했다면, 수학의 모든 참된 명제는 그 체계 안에서 증명 가능하고, 모순 없이 완결되었을 것이다. 힐베르트(David Hilbert) 역시 같은 꿈을 꿨다. 수학을 완전하고 무모순적인 형식 체계로 만들자는 포부였다.

 

1931년, 25세의 괴델이 이 꿈을 산산조각 냈다. 그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의 핵심은 이렇다. 산술(덧셈과 곱셈 정도)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형식 체계는, 그 체계가 무모순적이라면 반드시 그 안에서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명제를 포함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두 번째 정리다. 그 체계가 무모순적이라는 사실 자체를, 그 체계의 내부 언어로는 증명할 수 없다. 한마디로, 시스템은 자기 자신의 완결성을 내부에서 보증할 수 없다.

 

이것이 AI 논쟁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핵심은 요구의 구조에 있다. XAI를 둘러싼 논리를 뜯어보면, “AI는 자신의 추론 과정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등장한다. 겉으로는 단순한 설명 요구처럼 보이지만, 이 요구는 쉽게 시스템 내부의 언어로 자신의 작동 근거 전체를 해명하라는 요청으로 확장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괴델이 겨냥했던 자기 정당화의 문제와 구조적으로 맞닿는다. 러셀과 힐베르트가 수학의 완전한 자기 정당화를 꿈꾸다 실패했듯, XAI에 대한 집착 역시 유사한 교조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능을 부정하는 기준은, 결국 어떤 시스템도 충족할 수 없는 요구가 된다.

 

그렇다면 회의론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정말 ‘설명’일까? 표면적으로는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가”를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판단이 우연이 아님을 보증하라는 요구로 미끄러진다. 즉, 설명이 아니라 정당화, 더 정확히는 증명에 가까운 요구가 된다. 이 순간 요구의 성격은 바뀐다. 특정 출력에 대한 부분적 해석을 넘어, 시스템 전체의 신뢰성을 내부에서 입증하라는 요구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괴델의 논증과의 연결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는 짚어두자. 괴델의 정리는 엄밀히는 형식적 산술 체계에 관한 수학적 결론이지, 인공신경망의 해석가능성에 직접 적용되는 원리는 아니다. 구조적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이지 동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다만 핵심은 이것이다. '시스템이 자신의 작동 근거 전체를 내부에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얼마나 무리한 기준인지는, 인간 전문가의 경우를 봐도 충분히 드러난다. 숙련된 의사는 "왜 이 환자가 이 병인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완전한 인과 사슬을 제시하지 못할 때가 많다. 수십 년의 임상 경험이 압축된 직관이 먼저 답을 내놓고, 설명은 그 뒤를 따라온다. AI에게만 완전한 자기 해명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 전문가에게도 적용하지 않는 기준을 들이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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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설명가능성(XAI)을 회의론자만 쓰는 것은 아니다.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AI의 판단이 편향되지는 않았는지 검증하여 안전과 신뢰를 확보하겠다는 요구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블랙박스를 완전히 열어젖힌다 해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그곳에는 수조 개의 파라미터(Parameter)가 존재할 뿐이다. 파라미터란 AI가 데이터를 학습하며 단어와 문맥 사이의 미세한 관계를 수치로 치환한 '가중치'들의 거대한 바다다.

 

문제는 이 수조 개의 숫자가 얽혀 만들어낸 '판단의 근거'를 인간의 언어로 요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괴델이 시스템 내부의 언어만으로는 체계의 완결성을 증명할 수 없음을 보였듯, 고차원의 수치 체계를 빈약한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 순간 정보의 왜곡은 필연적이다. 결국 우리가 얻어내는 '설명'이란, 수조 번의 미세 조정을 거친 계산 과정을 인간이 납득하기 좋게 포장한 '사후적 서사'에 가깝다. 숙련된 의사의 직관이 수십 년의 경험이 응축된 결과이듯, AI의 판단 역시 숫자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정교한 수렴의 결과물이다. 단지 인간의 언어로 그 층위의 복잡성을 다 담아내지 못할 뿐이다.

 

게티어 문제는 이 ‘설명’의 더 근본적인 취약점을 찌른다. 앞서 말했듯 회의론자들이 요구하는 설명이란 결국 인공지능의 아웃풋이 요행이 아님을 증명하는 정당화 과정이다. 하지만 플라톤 이래 2,000년 동안 지식의 정의로 군림해온 정당화된 참된 믿음(Justified True Belief, JTB, 어떤 믿음이 ① 참이고 ② 그 믿음을 가질 합당한 근거가 있을 때 그것을 '지식'이라 부를 수 있다는 전통적 정의)은 1963년 세 쪽짜리 논문 한 편으로 파산했다.

 

이 논문의 저자 에드먼드 게티어(Edmund Gettier)는 정당화된 근거(설명)가 참이더라도, 단순한 운의 일치일 수 있음을 보였다. 예컨대 시계가 새벽 두 시에 고장나 멈춰 있는 줄 모른 상태에서, 오후 두 시에 우연히 시계를 보고 정확한 시각을 읽었다면, 그 믿음은 참이고 정당화되어 있지만 '지식'이라 부르기 어렵다. 같은 논리로, AI가 내놓는 설명이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정교해도(정당화), 그것이 실제 연산 과정과 무관하게 결과에만 끼워 맞춰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 설명을 이해했다고 간주해야 할까? 어쨌든 우연히 맞아떨어진 믿음이 지식이냐는 질문 앞에서 JTB는 무너졌고, 그를 살리려는 시도도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괴델과 게티어, 두 논증의 결합이 말하는 바는 간단하다. 인간의 이해라는 것도 실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서사이며, 운 좋게 수렴한 적합성에 붙인 이름일 수 있다. 자신들도 완전히 갖추지 못한 기준—완전한 자기 설명과 순수한 이해—을 AI에게만 강요하는 것. 이것은 인간 중심주의의 민낯이다. (c.f. 리처드 파인만의 자석 인터뷰: 그는 "자석은 왜 서로 밀어내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왜'의 층위를 내려가야 하는지, 그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 번역 불가능한 '그냥 그러한' 물리적 실재임을 역설했다.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3smc7jbUPiE)

 

기준 자체가 파산했다면, 우리는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이해'라는 정의를 버린 자리에 무엇을 놓을 것인가.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등장한다.

파인만의 인터뷰: 자석은 왜 서로 밀어낼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

 

4. 실용적 전회 — 비트겐슈타인의 사용론

 

그렇다면 지능의 본질(Essence)은 어디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은 본질주의(Essentialism, 모든 개념에는 그것을 규정하는 고정된 본질이 있다는 믿음)에 대한 해체다. '게임'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체스와 축구와 술래잡기를 모두 포괄하는 단일한 본질적 속성은 없다. 있는 것은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어딘가씩 닮아 있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특징은 없는 것처럼, 한 범주 안의 사례들도 그런 방식으로 연결된다는 개념)뿐이다. 코와 눈매는 아버지를 닮고, 입술과 이마는 어머니를 닮은 자녀처럼, 게임들은 서로 얽히고 겹치는 유사성의 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철학자 윌러드 콰인(W. V. O. Quine)의 유명한 사고실험이 결정적인 지원군이 된다. 아마존 밀림에서 처음 만난 원주민이 토끼가 지나가는 순간 '가바가이(Gavagai)'라고 외친다. 언어학자는 이것을 '토끼'로 번역하려 하지만, 사실 가바가이는 '토끼', '토끼의 떼어지지 않은 부분', '토끼의 순간적 단계', '토끼다움' 중 어느 것도 될 수 있다.9 어떤 관찰 증거도 이 번역들 사이의 올바른 선택을 결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 콰인의 결론이다—번역의 불확정성(Indeterminacy of Translation)이다. 의미는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작동하는 삶의 전체 맥락 속에서만 잡힌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이 함께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의미는 본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Use) 속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AI 비판에 정면으로 충돌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완전한 이해' 없이도 언어를 기능적으로 사용한 경험이 있다. 외국어를 처음 배울 때를 떠올려보자. 영어 단어 'melancholy'의 뉘앙스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도, 우리는 그 단어를 올바른 맥락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사전적 정의를 외우고, 다음에는 문장에서 맞닥뜨리고, 그다음에는 직접 써보고, 그렇게 수백 번의 맥락 속에서 의미가 살아난다. 이해가 먼저가 아니라, 사용이 먼저이고 이해는 나중에 따라온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수억 개의 맥락 속에서 단어의 패턴을 흡수하고, 그 맥락 안에서 적합하게 기능한다. 특정 언어 게임(Language Game,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개념으로, 언어는 진공 속의 추상적 규칙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맥락 안에서 사용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는 뜻)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지능이라는 가족의 일원이다.

 

결론은 질문의 교체다. "AI는 진정으로 이해하는가"라는 형이상학적(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의 근본 원리를 따지는) 질문을 폐기하고, "AI는 이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실용적 질문으로 전환하는 것. 검문소는 해체됐다. 이제 실재와 마주할 차례다.

 


5. 결론: 노이라트의 배, 실재는 얼룩덜룩한 세계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과학사회학자)의 비유를 다시 꺼낼 때가 됐다. 우리의 지식 체계는 망망대해 위의 배다. 안전한 육지 도크로 돌아가 배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할 수 없다. 낡은 판자를 하나씩 교체하며 항해를 이어갈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이론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때 파산하는 것은 이론이지, 현상이 아니다. 'AI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론이 알파폴드의 단백질 구조 예측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버려야 할 것은 그 이론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AI의 최적화 능력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제 모든 문제를 AI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겠다.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 과학철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단 하나의 보편 법칙으로 매끄럽게 지배되는 공간이 아니라, 각기 다른 층위의 법칙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얼룩덜룩한 세계(The Dappled World)다. 소득 불평등은 경제·사회학의 언어로, 뇌의 반응은 인지과학의 언어로, 단백질 구조는 생물정보학의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 AI가 단백질 접힘 문제를 푼다고 해서 역사적 인과나 사회 구조적 모순까지 최적화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각 층위에는 그 층위만의 고유한 인과 언어가 있다.

 

요컨대 이 글이 주장하는 것은 AI 만능론이 아니다. 단지 이것이다. AI가 탁월하게 작동하는 층위에서, 그것을 '이해'가 없다는 이유로 지능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은 자신들도 갖추지 못한 기준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일이라는 것. 학계의 일각은 여전히 '이해'와 '의식'이라는 낡은 닻에 줄을 묶어두고 있다. 그 사이 세계는 이미 최적화된 실재 위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AI에게 영혼이나 의식이 있는지 묻는 것을 그만두자. 대신 이것을 인정하자. AI는 인간의 인지가 처리할 수 없는 규모에서 통계적 질서를 추출하고, 목표를 향해 수렴하며, 맥락 안에서 적합하게 기능한다. 얼룩덜룩한 세계의 어떤 층위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의의 파산을 선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c.f.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과 가족유사성 개념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66-67에서 전개된다.

게티어의 논문은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1963), Analysis 23(6)으로, 분량은 세 쪽이지만 파급력은 수천 쪽짜리 저서를 능가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1931년 『수학연보(Monatshefte für Mathematik)』에 발표되었으며, 러셀과 힐베르트가 꿈꾸던 완전한 수학 체계의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논파했다.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변은 『Word and Object』(1960) 2장에서 전개되며, 가바가이 사례는 이후 분석철학의 의미론 논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사고실험 중 하나가 됐다.

칼 프리스턴의 자유에너지 원리는 『Nature Reviews Neuroscience』(2010)에 발표된 'The free-energy principle: a unified brain theory?'에 정리되어 있다.

반프라센의 <경험적 적절성> 과 <현상 구제 - Saving the phonomena>는 그의 저서 『과학적 상(The Scientific Image)』(1980) 2~3장에서 확인 가능하다.

낸시 카트라이트의 얼룩덜룩한 세계 개념은 『The Dappled World: A Study of the Boundaries of Science』(1999)에서 전개된다.

AlphaFold2 관련 기술 논문은 Jumper et al., 'Highly accurate protein structure prediction with AlphaFold', Nature 596, 583–589 (2021).

노이라트의 배 비유는 그의 논문집 『Philosophical Papers 1913-1946』, Chap. 7 "Protocol Statements( 1932)"의 두 번째 페이지에 있다. D. Reidel Publishing Company 판본 기준 92쪽.

 

c.c.f. 이 글은 주인장이 제미나이&클로드와 티키타카 하며 뼈대를 잡고 보완한 결과물이다. 그러니 이 글 자체가 인공지능이 언어 게임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 글을 작성하고 퇴고까지 하는데 24시간도 안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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