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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역실 #02] 한병철의 포켓몬 철학: 아무나 갖다붙이면 다 되는 줄 아나보슈?

by pragma 2026. 4. 29.

 


대중적 찬사를 받는 한병철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려 한다. 각 책의 줄거리는 Gemini에게 물어보면 순식간에 요약해 주니, 굳이 고전적인 서론-줄거리 요약-비평의 도식을 따르지는 않겠다.


미리 밝혀둘 것이 있다. 주인장의 철학 배경은 분석철학 계열이라, 한병철이 즐겨 소환하는 대륙철학 거장들을 깊이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개별 철학자에 대한 정밀한 독해 없이도 충분히 포착할 수 있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용의 방식, 논증의 구조, 그리고 결론이 전제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철학적 배경과 무관하게 따질 수 있는 문제다.

눈에 띄는 특징 하나. 이 양반은 철학자치고 굉장히 다작을 한다. 짧은 책을 여러 권 내는 것이다. 디자인은 또 잘 빠졌다. 저렴하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철학서.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마케팅을 경계해야 한다. 철학적 글은 빠르게 읽힌다고 능사가 아니다.

철학책들이 대부분 두꺼운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복잡한 생각을 추상적 용어로 압축할 때 발생하는 오독을 막기 위해 상세히 풀어야 하고, 원저의 맥락을 고려하며 비판적 코멘트를 남겨야 하며, 무엇보다 논리적 비약이 없도록 추론 과정을 탄탄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이 이렇게 짧으면 결론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먼저 든다.

미심쩍은 지점 하나 더. 출판된 책들의 제목만 쭉 훑어도 이 양반은 현대 사회를 <사랑과 공동체와 서사가 통째로 사라진 투명하고 매끄러운 사회에서 모든 것이 종말을 맞이하는 세상> 식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나 초기 하이데거의 문명 비관론을 떠올리게 한다. 기술과 근대성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그 오래된 탄식의 현대적 재포장이다. 한병철이 즐겨 소환하는 하이데거가 이 계보의 중심에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현대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칭한다. 대체 그 이전 시대가 얼마나 낭만적이기에 저런 결론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논점 일탈이니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한병철의 겸손은 없다 철학공장: 형용사만 갈아 끼우는 무한 복제 알고리즘


한병철의 저작들을 전수조사해 보면, 사실상 단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찍어내는 공산품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매번 반복하는 작법 패턴은 다음과 같다.

패턴 1: '상실의 서사'를 위한 키워드 쇼핑 : 그의 책은 언제나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아름다운 무언가"를 하나 골라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사의 위기』에서는 이야기가 사라졌고, 『리추얼의 종말』에서는 공동체의 의례가 소멸했으며, 『아름다움의 구원』에서는 매끄럽지 않은 미학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사회의 복잡한 변화를 데이터나 구조로 분석하는 수고 대신, 매력적인 추상명사 하나를 던져놓고 "우리는 이것을 잃어버려서 지옥에 살고 있다"는 현상학적 공포 마케팅을 펼칠 뿐이다. 이는 철학이라기보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를 파는 골동품 장사에 가깝다.

패턴 2: 만능 치트키, '부정성(Negativity)'의 오용 : 한병철 철학의 핵심인 부정성이란 나를 불편하게 하고, 가로막으며, 나와 다른 '타자성'을 의미한다. 그는 현대 사회가 오직 '좋아요'와 '매끄러움' 같은 긍정성만 남고, 이런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부정성'이 사라져서 망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사회 병폐를 이 부정성 결핍이라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몰아가는 지적 게으름을 부린다. 엄밀히 따져보면 부정성은 구체적인 사회적 실체가 없는, 단순히 "내가 싫어하는 현대적 특징의 반대말"로 기능하는 모호한 지시어일 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병철이 이 개념의 계보를 끝내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서 가져온 개념인지, 원래 어떤 맥락에서 작동하던 것인지를 명시하지 않으면 독자는 비판의 발판 자체를 빼앗긴다. 개념의 출처를 감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검증을 원천 차단하는 수법이다.

패턴 3: 근거 없는 인상 비평, 데이터 없는 공포 : 그의 비판에는 구체적인 데이터나 실증적 근거가 전무하다. 기술이 사회 구조와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양상을 소거한 채, 오직 "매끄러운 스마트폰 액정"과 "좋아요 클릭"이 인류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식의 기술 결정론적 공포에만 기댄다.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플랫폼 경제의 수익 구조가 어떠한지에 대한 사회학적·경제학적 분석은 생략한 채 "화면은 차갑고 사색은 따뜻하다"는 식의 이분법적 감상만 늘어놓는다. 그의 글은 통찰이 아니라 '인상'일 뿐이다.
 

포켓몬 인용술: 설명 없이 소환된 학자들의 불협화음

한병철의 책을 읽다 보면 당혹스러운 순간이 온다. 분명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거장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정작 그들이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 왜 이 자리에 함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쏙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논리적 연결이 아니라 권위의 나열에 가깝다. 적어도 포켓몬은 상대를 봐가면서 꺼내지, 이 경우는 일단 냅다 지르고 본다.

 

연결 논리 없는 병치

그는 권력의 감시 체제를 말하는 푸코와 예술의 가치를 말하는 벤야민을 한 페이지에 담는다. 이질적인 사상가들을 교차 독해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이 둘이 어떻게 만나 "디지털 사회의 지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지, 그 사이의 징검다리를 한병철이 끝내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미셸 푸코를 철저히 '훈육사회'라는, 그의 초기 개념 중 하나에 가둬두고 소비한다. 하지만 푸코는 생애 후반기에 이미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분석하며, 권력이 개인이 스스로를 자본으로 관리하게 만드는 '자기 경영'의 메커니즘을 짚어낸 바 있다. 한병철은 푸코 사유의 이 넓은 스펙트럼을 의도적으로 누락함으로써, 푸코를 단지 '낡은 감옥 간수' 정도로만 퇴장시킨다.
 
더 근본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푸코의 훈육 패러다임이 성과 패러다임으로 대체됐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자신의 핵심 논지로 내세운다. 그런데 후기 푸코는 『생명정치의 탄생』 강의에서 이미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분석하며, 개인이 스스로를 인적 자본으로 관리하도록 내면화하는 메커니즘을 정밀하게 해부했다. 한병철이 푸코를 극복했다고 믿는 바로 그 지점에, 푸코가 이미 서 있었던 셈이다. 푸코를 초기 개념에 가두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면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발터 벤야민을 소환하는 방식 역시 기만적이긴 마찬가지다. 그는 벤야민의 아우라(Aura) 개념을 빌려와 현대의 디지털 매끄러움이 사물의 깊이를 파괴했다고 탄식한다. 하지만 벤야민이 아우라의 붕괴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해방'에 있었다. 복제 기술은 예술의 신비주의적 장벽을 허물어 그것을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정치적 도구로 전환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이 발칙하고도 전복적인 잠재력은 쏙 빼놓은 채, 오직 '사라진 과거의 향수'라는 감상적인 측면만 추출해 낸다.

결국 한병철은 푸코를 빌려 수직적 권력의 공포를 조장하고, 벤야민을 통해 박물관에 갇힌 과거의 미학을 소환할 뿐이다. 신자유주의를 정교하게 해부했던 푸코의 통치성 이론이나, 기술의 정치적 가능성을 꿈꿨던 벤야민의 사유는 그의 상실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거세된다. 우리가 흔히 체리피킹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작가의 이 대담함은 단순히 맥락을 자르는 수준을 넘어, 아예 상충하는 세계관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데까지 나아간다.


불가능한 조합의 강요

타자와의 윤리를 강조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수학적 존재론을 펼치는 알랭 바디우를 동시에 소환하는 식이다. 이들은 사유의 뿌리부터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코미디는 여기서 터진다. 바디우는 그의 저서 『윤리학』에서 레비나스 식의 타자 중심적 윤리를 "이데올로기적 사기"이자 "종교적 위선"이라며 노골적으로 혐오했던 인물이다. 보편적 진리 사건을 추구하는 바디우와 개별적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라는 레비나스는 철학적 '앙숙'이나 다름없다. 한병철은 이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직 본인의 결론을 뒷받침할 '멋진 문장'만 쏙 빼온다. 이는 교차 독해와 백만 광년 먼, 자의적 취사선택의 극치다. 이처럼 거장들을 자기 입맛대로 조각내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논증의 실종, 즉 지적인 안개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c.f. 코미디가 하나 더 있는데, 바디우도 집합론을 철학에 접목시키려 애썼지만 정작 프랑스 수학자들은 바디우의 저작을 진지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설명 생략이 만든 지적 안개

하이데거니 니체니 하는 거창한 이름들이 책마다 등장하지만, 정작 이들의 복잡한 사유가 현대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와 어떻게 맞닿는지에 대한 논리적 징검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철학적 텍스트를 제대로 읽으려면 그 문장이 도출되기까지의 방대한 맥락과 논증의 연쇄를 복원해야 함이 마땅하다. 특히 니체와 하이데거는 맥락을 밝히지 않으면 초심자들이 오독하기 딱 좋다. 그러나 한병철은 이 거장들의 사유를 소화해 내기보다 자기 입맛에 맞는 문구만 핀셋으로 집어온다.심지어 하이데거나 니체의 개념을 신자유주의라는 구체적인 시대적 맥락 속에 녹여내려는 최소한의 분석적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병철이 신자유주의를 싫어하는 것은 알겠는데, 이것이 경제 용어인 만큼 최소한 경제적 사회적 맥락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게 순리 아닌가? 하다못해 부의 양극화라도 좀 짚는게 어떤가 싶다. 우리가 속칭 <먹물 묻은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현상비평이 아니라 그 이면의 구조적 원인을 파헤치는 것이다. 열이 나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가 대뜸 "환자분의 고통은 사회에서 타자의 상실로 인해 존재의 떨림이 긍정성 속으로 함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딴 소리나 한다고 생각해 보라. 결국 이론적 언어가 현실의 구체적인 지표(Data)와 연결되지 못한 채 겉도는 것은 학술적 깊이가 아니라, 논리적 구멍을 화려한 이름으로 메우는 기만이다.
 

총론

이 글의 핵심 비판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다. 한병철의 언어는 현대인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척하지만, 실은 현대인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은근슬쩍 깎아내린다.

대중은 현 자본주의 체제가 더럽고 치사하다는 걸 이미 인식하고 있다. 다만 그들이 나서서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는 건 그의 말처럼 '자기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당장의 대안이 없기 때문에 시스템 안에서 최선의 생존 전략을 짜고 있는 것이다. 이 구분은 사소하지 않다. 전자는 대중을 무기력한 피해자로 보는 시선이고, 후자는 대중을 나름의 합리성으로 움직이는 행위자로 보는 시선이다. 한병철은 일관되게 전자의 편에 선다.

스타 철학자들을 무덤에서 소환하여 '현대'라는 생동하는 괴물을 진단하려는 시도는 유감스럽게도 얄팍하고 정교함이 없다. 우리가 겪는 불행은 한병철 류의 강렬한 수사학으로는 진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훨씬 더 깊고 구조적이다. 각성제가 마시면 잠깐이지 근본적인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 언어의 안개를 걷어내고 실재하는 경제적·사회적 모순을 직시하는 것이 백번 낫다.


c.f. 이 양반이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뭐라 말할지 대충 예상이 간다. 학습모델과 알고리즘의 원리로 설명하기보다 본인이 했던 말을 적절히 섞어서 내놓을 것이다 - 투명성, 부정성의 소멸, 서사의 종말 같은 표현과 함께. 본질을 외면하고 겉도는 이런 장사꾼 때문에 인문학이 말라 죽어가지, 제엔장.
c.c.f. 한병철이 주류 철학 학술지에서 엄밀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상아탑이 보수적이라고 욕은 먹을지언정, 거기서 인정받으려면 철저히 정직함과 논리의 정합성으로 승부해야 하므로.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것은 평가가 이미 끝났다는 뜻이다.


[독자를 위한 제언: 안개 너머의 실재들] 영양가 없는 에세이 대신, 실증적 데이터와 탄탄한 구조 분석으로 무장한 학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인공지능과 데이터 사회의 실질적 이해: 어제이 애그러월, 캐시 오닐, 쇼샤나 주보프, 케이트 크로포드, 멜라니 미첼 등
현대 경제 구조와 불평등의 통찰: 토마 피케티, 브랑코 밀라노비치, 에스테르 뒤플로, 아브지히트 바네르지, 대런 애쓰몰루, 조엘 모키르, 폴 크루그먼, 조세프 스티글리츠 등

한병철의 일부 저작에 대해서는 이우창 교수께서 날카롭게 비평한 글들이 있다. 링크를 첨부한다.
시간의 향기: https://begray.tistory.com/m/40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https://begray.tistory.com/m/166
아름다움의 구원: https://begray.tistory.com/m/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