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애호가로서 쓴 글이다. 팩트에 기반한 지적은 언제나 환영한다.
**3월 초에 네이버블로그에 썼던 글을, 아카이빙 차원에서 살을 붙여 다시 올린다.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결국 이란을 건드렸다. 2026년 2월 28일 새벽, 미국과 이스라엘은 합동 공습으로 이란의 핵시설·군사시설·정부 시설을 타격했다. 개전 첫날 이스라엘 공습은 테헤란에서 열린 정부 고위급 회의 세 곳을 30초 간격으로 동시에 강타했고,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علی خامنهای, Ali Khamenei)가 그 자리에서 암살됐다. 이란은 탄도미사일과 드론으로 이스라엘과 걸프 지역 미군 기지를 반격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했다. 국제 유가가 출렁였고 두바이 국제공항이 일시 폐쇄됐다. 4월 8일 조건부 휴전이 선언됐지만, 협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개전의 배경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2025년 6월 이스라엘-이란 12일 전쟁—그때 이미 이란의 핵시설과 방공망이 한 차례 크게 파괴됐다. 다른 하나는 2025년 12월 터진 이란 역사상 1979년 이후 최대 규모의 민중 항쟁이다. 도널드와 벤야민은 이란이 안팎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이란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국가인 줄 알았나 보다. 이란의 신정정권이 어쩌구 하메네이가 나쁜 놈이어도, 외부의 폭격에 이란 민중이 호응했는가? 정권을 비판하던 젊은이들조차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겠다, 너희더러 도와달라 한 적 없다"며 협조하지 않았다. 이 역설은 우연이 아니다. 이 갈등 너머에는 유구한 이란의 역사가 있다. 수천 년에 걸쳐 무수히 외세에 유린당하면서도 끝내 정체성을 지켜낸 문명이 있고, 그 문명의 DNA가 오늘날 이란인들의 뼛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라는 말은 서구에서 붙인 것이고 당사자들은 자기가 사는 땅을 계속 이란이라 불렀으므로, 주인장은 후자를 존중하겠다.
이란은 중동에서 이집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9,000만의 대국이다. 영토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 카자흐스탄,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과 더불어 굉장히 넓은 나라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1,000m 이상의 험악한 고원지대라 뭐가 없어 보이는데도 이 거대한 인구를 부양한다는 것은 이 땅이 잠재력이 있다는 증거다.
지리는 단순히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북쪽의 알보르즈(Alborz) 산맥과 서쪽의 자그로스(Zagros) 산맥은 자연이 제공한 거대한 방어선이다. 동쪽에서 쳐들어온 알렉산드로스도, 북쪽에서 내려온 몽골도, 서쪽에서 밀어붙인 오스만도 결국 이 산악지형에서 기동력을 잃었다.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이 펼쳐지고, 그 끝에 호르무즈(Hormuz) 해협이 있다. 전 세계 원유 수출의 상당 부분이 이 좁은 목구멍을 통과한다. 이란이 여기를 막겠다고 협박할 때마다 국제 유가가 출렁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 이란은 단순한 중동 국가가 아니다. 카스피해와 페르시아만을 동시에 끼고, 중앙아시아·남아시아·중동을 잇는 교통의 요지다.
원래 이란의 강역은 지금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물론 유프라테스강 동쪽과 아프가니스탄 상당 부분까지 아우르는 거대 지배 영역이었다. 사파비조 이후부터 오스만, 중앙아시아 민족과의 마찰과 영국, 러시아의 개입으로 땅이 줄어든 것이 오늘의 결과다. 지금의 이란인들이 지도를 펴고 자기 조상의 영역을 볼 때 느끼는 감각이 어떨지, 한 번쯤은 상상해볼 일이다.
국가로서의 이란의 역사는 기원전 500년 키루스 2세(کوروش بزرگ, Cyrus the Great)가 세운 아케메네스(Achaemenid) 왕조부터 시작된다. 단, 이 시작이 범상치 않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정복한 뒤 포로로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석방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점령지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와 관습을 유지할 권리를 허락했다. 이 선언을 담은 키루스 실린더(Cyrus Cylinder)는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UN은 이를 최초의 인권 문서 중 하나로 간주한다. 물론 현대적 기준의 인권과 동일시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당시 기준에서 정복자가 피정복민의 신앙을 존중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داریوش یکم, Darius I)는 제국의 행정을 체계화했다. 전국을 사트라피(Satrapy)라 불리는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왕의 눈(King's Eyes)이라 불리는 감찰관을 파견해 총독을 견제했다. 제국 전역을 잇는 왕도(Royal Road)는 수사(Susa)에서 사르디스(Sardis)까지 2,500킬로미터를 연결했으며, 역마 제도를 통해 7일 안에 전달을 완료할 수 있었다. 이 행정 인프라는 훗날 알렉산드로스가 그대로 베껴 쓸 만큼 정교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er the Great)에게 한 번 밟혔어도 그리스계 정권은 금방 몰락했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이란 문화에 매혹되어 페르시아 궁정 복식을 입고 이란인 귀족과 혼인하는 등 오히려 이란화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가 죽자 제국은 쪼개졌고, 이란 땅에 들어선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는 이란인들에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착 이란계 파르티아(Parthia)가 정권을 되찾았다.
파르티아와 뒤를 이은 사산(Sasanian) 왕조의 황제들은 로마 제국과 자주 마찰이 있었고, 가끔은 굴욕을 주기도 했다. 기원전 53년 카르하이(Carrhae)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은 크라수스(Crassus)가 이끄는 로마 정예군을 괴멸시켰다.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Shapur I)는 260년 에데사(Edessa) 전투에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를 생포하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수모를 안겼다. 그 장면은 이란 남부 낙쉐 로스탐(Naqsh-e Rostam)의 암벽에 부조로 새겨져 지금도 남아있다. 굴복한 로마 황제가 이란 왕 앞에 무릎을 꿇은 그림이다. 이란인들이 역사를 들먹일 때의 무게가 이 정도다.
651년 아랍인들에게 정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문명적 종주권은 굳건했다. 칼 들고 온 아랍인 정복자들은 제국을 경영할 머리가 없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이란인들을 관료로 앉혔는데, 이게 단순한 고용이 아니었다. 동시에 이란인들의 편에서도 조직적인 문화 반격이 이루어졌다. 9세기를 전후로 '슈우비야(Shu'ubiyya)'라 불리는 문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란 출신 지식인들이 아랍인의 우월성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우리 페르시아 문명이 훨씬 오래되고 세련됐다"고 주장한 운동이다. 무력으로 진 전쟁을 펜으로 되찾으려 한 셈이다.
이슬람 황금기의 핵심 소프트웨어는 죄다 이란산이었다. 현대 의학의 기초를 닦은 이븐 시나(ابن سینا, Ibn Sina / Avicenna, 980~1037)의 『의학정전(Canon of Medicine)』은 유럽 의과대학에서 17세기까지 교재로 쓰였다. 그는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 물리학, 천문학에서도 독보적 업적을 남긴 종합적 지성이었다. '알고리즘'의 어원이 된 수학자 알 콰리즈미(al-Khwarizmi, 780~850)는 대수학(Algebra)의 창시자다. '알지브라(Algebra)'라는 단어 자체가 그의 저서 제목에서 왔다. 화학의 자비르 이븐 하이얀(Geber, 721~815)은 실험을 통한 검증이라는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이 시대에 이미 실천했다.
문학에서는 피르다우시(فردوسی, Ferdowsi, 940~1020)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아랍화 압력이 거세던 시절, 그는 30년에 걸쳐 방대한 분량의 대서사시 『샤나메(Shahnameh, 왕들의 서)』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아랍어가 아닌 순수 페르시아어로 쓰였고, 아케메네스와 사산 왕조의 영웅 신화를 담아 이란의 정체성과 기억을 보존했다. 아랍의 정복으로 언어도, 종교도 바뀌었지만, 이란인들은 이 서사시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이란이다"라는 감각을 유지했다. 오마르 카이얌(عمر خیام, Omar Khayyam, 1048~1131)은 시인으로 서구에 알려졌지만 본업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다. 그가 개정한 이란 태양력은 그레고리력보다도 정확하다. 이렇듯 소위 '이슬람 석학'이라 불리는 이들의 상당수가 이란인이었다. 아랍어는 단지 종교를 위한 껍데기였을 뿐, 그 안을 채운 철학, 수학, 천문학, 행정 시스템은 이란의 고대 지적 자산을 이슬람이라는 그릇에 옮겨 담은 것에 불과했다.
이란의 문화는 예술에서도 정점을 찍었다. 이슬람이 우상 숭배라며 그림을 금기시할 때, 이란인들은 세밀화(Persian Miniature)라는 독보적인 시각 예술을 창조해냈다. 세밀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금박을 사용한 화려한 색감, 원근법을 무시한 이란 특유의 공간 구성, 시와 회화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형식은 그 자체로 완결된 미학 체계였다. 헤라트(Herat)와 타브리즈(Tabriz)는 이 예술의 중심지였고, 베흐자드(Bihzad, 1450~1535 경)는 그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 미적 표준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훗날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Mehmed II)는 베네치아 화가 벨리니를 모셔오는 동시에 이란 화가들을 궁정에 두었다. 인도 무굴 제국의 아크바르 대제(Akbar the Great)는 이란 세밀화 전통을 들여와 무굴 세밀화를 탄생시켰고, 궁정의 공용어로 페르시아어를 채택했다. 무굴 왕조는 이름도 페르시아어로 '몽골'이고, 왕실 문서도 페르시아어로 작성했으며, 시(詩)는 페르시아 고전 형식을 따랐다. 오스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술탄들은 페르시아어 시를 짓는 능력을 교양의 필수 항목으로 여겼다. "교양 있는 통치자라면 페르시아 시를 읊고 이란식 세밀화로 궁전을 장식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이슬람 세계의 상식이었다. 정복자는 튀르크나 몽골이었을지언정,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한 소프트웨어는 철저히 이란제였던 셈이다.
11세기 셀주크 튀르크가 중동을 먹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들은 조조가 허수아비 헌제를 끼고 천하를 호령했듯, 명목상의 압바스 칼리파를 보호하며 실무는 이란인 재상 니잠 알 물크(نظامالملک, Nizam al-Mulk, 1018~1092) 같은 이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니잠 알 물크가 저술한 『시야사트나메(Siyasatnama, 통치의 서)』는 중세 이슬람 세계의 핵심 국정 교과서였다. 현대 경영학 용어로 바꾸면 거버넌스 매뉴얼인 셈인데, 적재적소 인사 배치부터 정보 수집, 군사 운용, 재정 관리까지 망라한 이 책은 당대 최고 실무자의 경험을 집대성한 결과물이었다.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몽골의 훌라구(Hulagu Khan)가 세운 일 칸국(Ilkhanate)조차 스스로를 '이란인의 나라(Iranzamin)'라 불렀고, 이란의 행정 체계와 예술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다. 초기에는 불교와 샤머니즘을 믿던 훌라구의 후계자들은 결국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이란 관료와 예술가들을 궁정에 들였다. 유목민이 정착하는 순간 이란에 동화되는 구조가 반복된 것이다.
뒤이은 티무르(Tamerlane, 1336~1405) 역시 칭기즈칸 후예를 자처했지만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이란이었다. 그는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아 당대 최고의 이란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모았고, 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사마르칸트에서 보는 청색 돔과 기하학적 타일 장식이다. 심지어 티무르 본인은 페르시아 시를 애송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사마르칸트에 가 보면 티무르 제국 당시 이란 문화의 영향을 받은 건축이 보존되어 있다. 정복자의 이름은 남았지만, 그 아래 깔린 문명의 층위는 이란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사파비(Safavid) 왕조가 등장하며 오늘날 이란의 정체성이 확정된다. 1501년 이스마일 1세(اسماعیل یکم, Ismail I)가 타브리즈를 수도로 삼고 왕조를 열었을 때, 이란은 대부분 수니파 지역이었다. 당시 옆 동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의 대장인 칼리파—대충 가톨릭의 교황이라 보면 된다—직을 접수하고 전 이슬람의 맹주를 선언하자, 이스마일은 "우리가 튀르크 놈들에게 허리를 숙여야 하냐"며 소수파이던 시아파를 국교로 박아버렸다. 이건 단순한 종교적 선택이 아니라 고도의 지정학적 생존 전략이었다. 수니파인 오스만과 확실히 선을 긋고 우리만의 독자적인 성벽을 쌓은 것이다.
이 전략은 이후 400년 이란의 운명을 규정했다. 시아파 이슬람은 이란에서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 '이란인 = 시아파'라는 등식이 형성되면서, 이란은 오스만과 수십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파비 왕조의 최전성기는 샤 아바스 1세(شاه عباس یکم, Shah Abbas I, 재위 1588~1629) 치하였다. 그는 수도를 이스파한(Isfahan)으로 옮기고 도시를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다. 이맘 광장(Imam Square), 이맘 모스크, 알리 카푸(Ali Qapu) 궁전 등 지금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물들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당시 방문한 유럽 외교관들이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Isfahan nesf-e jahan)"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리한 개종 정책은 부작용도 심했다. 유능한 수니파 인재들이 인도 무굴 제국 등으로 망명하면서 이란은 스스로 국력을 갉아먹었고, 결국 왕조의 명줄을 재촉하게 되었다. 1722년 아프간 부족의 침공으로 사파비 왕조가 무너진 뒤, 나디르 샤(نادر شاه, Nader Shah)의 짧은 아프샤르(Afshar) 왕조라는 막간극이 있었다. 나디르 샤는 군사적 천재였지만 파라노이아에 가까운 성격으로 측근을 학살하다 결국 암살당했다. 이후 들어선 카자르(Qajar) 왕조는 나름대로 오래 이란 땅을 운영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비극은 차원이 달랐다. 시작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북해로의 진출이 막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부동항을 노렸다. 그래서 찔러본 곳이 세 군데인데, 첫째가 지중해로 통하는 보스포루스 해협—그러니까 지금의 터키고, 둘째가 극동—만주와 한반도, 셋째가 중앙아시아와 이란이었다. 이 움직임에 기겁한 것은 해양 패권을 쥐던 영국이었다. 인도를 지키려면 이란이 완충지대여야 했다. 바야흐로 반세기 동안 이어지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인 것이다.
이란은 러시아에게 두 번에 걸쳐 큰 영토를 뜯겼다. 1813년 굴레스탄(Golestan) 조약으로 조지아·다게스탄 등 캅카스 지역을 잃었고, 1828년 투르크만차이(Turkmenchay) 조약으로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북부를 추가로 상실했다. 이 두 조약은 이란 역사에서 굴욕의 대명사다. 투르크만차이 조약은 특히 가혹했는데, 영토 할양뿐만 아니라 러시아 시민들에게 이란 내에서 치외법권을 부여했다. 사실상 반식민지 조약이었다.
영국도 만만치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을 두 차례 침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면서, 동시에 이란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했다. 1890년 카자르 왕조는 영국의 제럴드 탤벗(Gerald Talbot)에게 이란 전역의 담배 생산·판매·수출을 50년간 독점하는 권리를 팔았다. 이란인들은 들고 일어났다. 시아파 최고 성직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12대 이맘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파트와(fatwa)를 선언하자, 이란인들은 담배를 끊고 파이프를 집어던졌다. 샤의 후궁들조차 거부했다. 담배 보이콧은 성공했고, 카자르 왕조는 계약을 파기해야 했다. 대신 거액의 위약금을 영국에 물어야 했고, 그 돈을 갚느라 또 외채에 허덕였다. 불쌍한 이란은 이 둘을 상대할 국력이 아니었고, 식민지는 면했으나 러시아에게 캅카스 남쪽의 영토를 뜯기고 영국에게 온갖 이권을 잠식당하며, 종국에는 양국에 내정간섭을 받는 상태로 전락했다.
이 민족적 좌절은 1906년 입헌혁명(Constitutional Revolution)으로 터졌다. 이란 민중과 성직자, 개혁파 지식인이 연대하여 카자르 왕에게 헌법과 의회(마즐리스, Majlis)를 요구했다. 왕은 결국 굴복했고, 이란은 중동 최초의 헌법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는 1907년 협정을 맺어 이란을 북부(러시아 세력권)와 남부(영국 세력권), 그리고 중립지대로 나눠가졌다. 이란인들이 요구한 민주주의를 열강이 밖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이 석유였다.
1901년 영국의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아시(William Knox D'Arcy)가 카자르 왕조로부터 이란 전역의 석유 채굴·탐사·수출 권한을 60년 동안 독점하는 특혜를 받아낸다. 대가는 현금 2만 파운드와 2만 파운드 상당의 주식, 그리고 순이익의 16%였다. 이란 영토 전체를 60년간 통째로 판 것치고는 어처구니없이 싼 값이었다.
그리고 1908년 유전이 발견되자 영국은 이 권리를 바탕으로 앵글로-퍼시안 석유 공사(APOC, 현 BP의 전신)를 세웠다. 1차 대전 직전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영국 해군을 석탄 대신 석유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APOC에 대한 영국 정부의 지분 51%를 확보했다. 이란 땅에서 뽑아낸 기름으로 대영제국의 해군력을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이란 정부가 받은 수익은 회사가 발표하는 이익의 16%였는데, 회사가 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할 의무가 없었다. 이란 측에서 독립적인 감사를 요청해도 거부당했다. 이란은 자국 땅의 기름으로 돈을 버는 회사의 장부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러다 1919년 영국은 이란을 아예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영국 고문단이 이란의 재정과 군사를 장악하고, 이란의 철도와 인프라 건설권을 영국이 독점하는 사실상 반식민지 조약을 들이민 것이다—비슷한 시기 일본이 비슷한 조약을 중국에 들이밀었는데 나쁜 짓은 참 잘도 따라한다. 비록 이란 민중과 정치권의 강력한 반대로 정식 비준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카자르 왕조의 무능을 만방에 증명했다.
1925년 보다못한 레자 샤 팔레비(رضا شاه پهلوی, Reza Shah Pahlavi)가 쿠데타로 정권을 바꾼 후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는 터키의 아타튀르크(Atatürk)를 모범으로 삼았다.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금지하고 서구식 복식을 강제하는 세속화, 이란종단철도 건설, 테헤란 대학 설립, 도량형 통일, 근대적 법원 제도 수립 등 근대화 하면 나오는 정책들이다. 1935년에는 국호를 국제사회에서도 '페르시아' 대신 '이란'으로 부를 것을 요청했다. 이전부터 이 땅의 주인들이 스스로 불러온 이름을 공식화한 것이다.
그러나 열강들은 이란의 자강 시도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2차 대전 중 레자 샤는 독일과 경제 협력을 추진했는데, 영국과 소련에게는 이것이 독일-이란 밀월의 증거로 비쳤다. 1941년 양국은 아무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침공해 레자 샤를 강제 퇴위시키고 아들 모하마드 레자(Mohammad Reza)를 허수아비 샤로 앉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소련은 이란 북부에 괴뢰 공화국을 세우려다 미국의 압박으로 철수했다. 이란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는 이랬다: 우리가 중립을 선언해도, 우리 땅을 근대화하려 해도, 언제나 강대국들이 와서 뒤집어놓는다.
이 수난사의 클라이맥스가 1951년 선출된 모하마드 모사데크(محمد مصدق, Mohammad Mossadegh) 총리다. 그는 APOC의 착취적 계약 구조를 면밀히 분석했다. 이란이 받는 몫이 인건비와 운영비를 제하면 실질적으로 순이익의 10~15%도 안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석유 국유화를 선언하며 주권을 외쳤다. 이란 의회는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란인들은 거리로 나왔다. 모사데크는 『타임』의 1951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영국은 경제 제재와 해상 봉쇄로 맞섰고, 미국에 이란 전복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트루먼 행정부는 거절했지만, 1953년 아이젠하워가 취임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CIA와 MI6은 '아약스 작전(Operation Ajax)'을 개시했다. 케르밋 루스벨트 주니어(Kermit Roosevelt Jr.)가 이란에 잠입해 이란 언론에 돈을 뿌려 모사데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기사를 쏟아내게 했다. 군중을 매수해 친모사데크 시위와 반모사데크 시위를 동시에 조직해 혼란을 만들었다. 이란 군부를 포섭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3일 만에 모사데크는 체포되어 가택 연금되었고, 1967년 죽을 때까지 그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란의 민주주의를 영국과 미국이 합작해 짓밟은 것이다.
이후 전권을 잡은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محمد رضا پهلوی, Mohammad Reza Pahlavi) 샤는 미국의 비호 아래 석유 자본을 쏟아붓는 '백색혁명(White Revolution, 1963)'을 단행했다. 토지개혁, 여성 참정권, 문맹 퇴치 캠페인, 국영 기업 민영화, 산림 국유화 등 6개 원칙으로 시작해 점차 확대된 일련의 근대화 개혁이다. 실제로 이 시기 이란의 경제 성장률은 비약적이었고,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석유 수입이 폭증하면서 이란은 중동의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다. 1971년 팔레비 샤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창건 2,5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세계 70여 개국 국왕과 수반이 참석한 이 행사는 "이란은 돌아왔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문제도 심각했다. 높은 성장률은 필연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을 수반했다. 세속화 정책으로 시아파 성직자들은 분노했다. 호메이니(روحالله خمینی, Ruhollah Khomeini)는 이미 1963년 팔레비의 개혁을 비판하다 추방당해 이라크 나자프(Najaf)에서 망명 중이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토지개혁은 의도와 달리 실패했다. 지주들이 땅을 분할 매각하고 현금화하면서, 농민들은 소규모 영농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농촌을 떠나 테헤란으로 몰려든 빈민들은 남부 빈민가에 정착했고, 이들이 훗날 혁명의 하층 동력이 된다. 게다가 팔레비 샤는 국민들의 불만을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이용해 탄압했다. 미국 CIA가 훈련시킨 사바크는 반체제 인사를 고문하고 처형했다. 국제앰네스티는 1970년대 이란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권 탄압 국가 중 하나로 분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바크를 만들어준 나라가, 모사데크를 무너뜨린 바로 그 미국이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인권을 외교 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웠지만, 1977년 팔레비와 건배하며 "이란은 불안의 섬 속의 안정의 섬"이라고 추켜세웠다.
결국 이 복합적인 문제들이 임계점에 도달해 1979년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으로 폭발했다. 혁명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서구의 꼭두각시 왕을 끌어내리고 이슬람 법에 따라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자." 1979년 2월 호메이니가 귀국하자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졌다. 팔레비는 나라를 떠났다. 이란인들이 지금의 신정 체제를 선택한 배경에는, 서구 민주주의(모사데크)를 스스로 짓밟았던 영·미의 원죄가 도사리고 있다.
호메이니가 도입한 통치 체계는 '벨라야트-에 파키(Velayat-e Faqih)', 즉 이슬람 법학자의 통치다. 이 개념에 따르면 최고 권위는 선출된 대통령이나 의회가 아니라, 신학자 중에서 선출된 최고지도자(Supreme Leader)에게 있다. 이 체제는 공화국의 외양(대통령, 의회, 선거)과 신정의 실질(최고지도자의 거부권, 수호자위원회의 후보 심사)을 결합한 독특한 혼합 구조다. 혁명 직후 이란은 이 체제의 미완성 상태에서 곧바로 시험대에 올랐다.
1979년 11월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외교관 52명을 444일간 억류한 인질 사태는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밀어넣었다. 1980년에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이 이란의 혁명 혼란기를 틈타 침공했다.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1980~88)은 양측 합산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낸 20세기 중동 최대의 재래식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이라크 편을 들었다. 사담에게 위성 정보를 제공했고, 이란에 대한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묵인했다. 이 사실은 이란인들의 기억에 지금도 선명하다.
호메이니가 1989년 사망한 뒤 알리 하메네이(علی خامنهای, Ali Khamenei)가 최고지도자직을 이어받았다. 1990년대 말 모하마드 카타미(محمد خاتمی, Mohammad Khatami) 대통령 치하에서 일시적인 개혁 기류가 흘렀지만, 수호자위원회(Guardian Council)가 의회 입법을 줄줄이 거부하면서 좌초했다. 2005년 등장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محمود احمدینژاد, Mahmoud Ahmadinejad)는 반미·반이스라엘 수사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면서 국제사회와 전면적으로 충돌했다. 이란의 핵 개발 프로그램이 국제 의제로 부상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란의 핵 개발 동기를 이해하려면 앞서 서술한 역사를 되새겨야 한다. 이 나라는 외세에 의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고, 화학무기를 쓴 이라크를 미국이 비호하는 것을 경험했으며, 핵을 보유한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군사적으로 무소불위로 행동하는 것을 지켜봤다. 핵무장은 억지력의 최후 수단이다. 2015년 오바마 행정부가 이란과 체결한 핵합의(JCPOA)는 이 딜레마를 외교적으로 관리하려는 시도였다. 이란이 핵 활동을 제한하는 대신 제재를 해제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는 일방적으로 협정을 탈퇴했고,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정책으로 이란 경제를 다시 조였다.
2020년 1월, 트럼프 행정부는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Quds Force)의 사령관 거셈 솔레이마니(قاسم سلیمانی, Qasem Soleimani)를 드론으로 암살했다. 쿠드스군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예멘 등에서 친 이란 무장 조직을 지원하고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 무장단체의 배후로 솔레이마니를 지목했다. 제거 명분은 추가 테러 모의의 방지였지만, 솔레이마니는 엄연히 주권 국가의 정규군 장성이었고, 살해당한 장소는 제3국인 이라크였다. 이는 이란과 이라크 양국의 주권 침해이자 국제법 위반이라는 각국 언론의 지탄과 함께, 이란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022년 9월, 쿠르드계 여성 마흐사 아미니(مهسا امینی, Mahsa Amini)가 히잡 착용 불량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지 사흘 만에 구금 중 사망했다. 당국은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목격자와 가족의 증언은 달랐다. 이 사건에 촉발된 "여자, 생명, 자유(Zan, Zendegi, Azadi)"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수개월간 지속되며 이란 신정체제 최대의 정치적 위기가 되었다. 체제는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2025년 6월, 이스라엘이 선제 타격을 감행했다. 'Rising Lion 작전'으로 명명된 이 공습에서 전투기 200대 이상이 이란의 핵시설과 군사 기지 100여 곳을 기습했다. 미국은 6월 22일 참전해 벙커버스터로 나탄즈·포르도·이스파한 핵시설을 타격했다. 6월 24일 오만의 중재로 휴전이 선언됐다. 트럼프는 이를 "12일 전쟁(Twelve-Day War)"이라 불렀다. 이란은 핵시설과 방공망을 잃고 군 수뇌부와 핵과학자들을 잃었다.
경제는 더 나빠졌다. 2025년 한 해에만 리알화 가치가 절반 가까이 폭락했다. 12월 28일, 인내의 끝이 왔다. 테헤란 그랜드 바자르의 상인들이 리알화 폭락에 항의하며 가게 문을 닫았다. 시위는 하루 만에 정치적 성격을 띠었고, 전국 200개 이상의 도시, 31개 주 전체로 번지며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항쟁이 됐다. 체제는 2026년 1월 8일 인터넷을 전면 차단하고 시위대에 실탄을 사용했다. 사망자 수는 출처마다 크게 엇갈린다. 이란 정부는 3,110명이라 했고, 이란인권활동가뉴스(HRANA)는 최소 6,200명 이상, 이란인터내셔널(Iran International)은 3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인터넷 차단 속에서 독립적 검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내부가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한 배경이었다.
그리고 다시 서두로 돌아온다. 트럼프와 네타냐후는 이 항쟁의 연기를 보고 "이제 때가 됐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내부가 흔들릴 때 우리가 군사적으로 하메네이를 암살하면, 이란인들이 환호하며 민주화를 이루겠지라고.
이것은 역사를 전혀 읽지 못한 오판이다.
3,000년의 이란 역사에서 하나의 패턴이 반복된다. 외부에서 이란을 밟으려 할 때, 이란인들은 내부의 분열을 멈추고 하나가 된다. 아케메네스는 그리스의 침공에 맞섰다. 아랍의 정복을 받아들이면서도 문화적 주도권을 되찾았다. 몽골도, 티무르도, 오스만도 이란의 소프트웨어에 역으로 흡수됐다. 영국이 모사데크를 무너뜨렸을 때, 이란인들은 결국 이슬람 혁명으로 응답했다. 솔레이마니가 암살당했을 때, 그를 비판하던 이란인들조차 거리로 나왔다.
이란은 이라크가 아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이라크에는 수천 년의 단일한 국가 정체성이 없었다. 수니파와 시아파, 아랍인과 쿠르드인으로 분열된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이라는 강압적 접착제가 제거되자 분열했다. 이란은 다르다. 종족 구성으로 보면 페르시아인이 전체의 60% 정도이고 아제리, 쿠르드, 아랍, 발루치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묶는 것은 종교(시아파)와, 그 이전에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이란인'에 대한 공동의 감각이다. 페르시아어 시를 외우고, 노루즈(Nowruz, 이란 새해)를 함께 쇠고, 키루스와 모사데크를 자기 조상으로 기억하는 것이 이란인의 정체성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그 정체성에 정면으로 침을 뱉은 행위였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한다"는 것이 이들의 본심이다. 체제를 비판하는 이란인과 체제를 지지하는 이란인이 일치하는 단 하나의 지점—그것은 외세가 이란의 운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53년 그 진실을 영국과 미국이 증명해줬고, 그 결과가 1979년 이슬람 혁명이었다. 2025년에도 같은 오판을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 결과가 무엇일지는 역사가 이미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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