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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01] 정조는 과연 개혁군주였는가?

by pragma 2026. 4. 30.

 

 

역사 애호가의 시각에서 쓴 글임을 미리 밝힌다. 팩트에 기반한 지적은 언제나 환영한다.

 

대중 역사 콘텐츠에서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효(孝)’, ‘명군(明君)’, ‘개혁군주’, '계몽군주'다.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이장하고 정성껏 단장하며 매년 참배를 거르지 않았던 행보를 보면 ‘효’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국왕으로서 정사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력적으로 국정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명군’이라는 평가 역시 어느 정도 부합한다. 그러나 ‘개혁군주’라는 수식어에 이르면, 우리는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인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본래 개혁(Reform)이란 국가의 근본 틀(國體)을 유지하되, 수명이 다한 낡은 제도를 근본적으로 쇄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조직의 외피만 남기고 내부의 핵심 동력을 완전히 교체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쉽지 않으며, 세계사적으로도 성공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웃 나라 일본의 메이지 유신 정도가 체제 전환에 성공한 유일무이한 사례로 꼽힐 뿐이다.

 

반면 실패의 기록은 도처에 널려 있다. 고려 공민왕의 반원 자주 개혁, 조선 고종의 광무개혁, 청나라의 양무운동,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가 대표적이다. 이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내부 기득권의 강력한 반발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라는 파고를 넘지 못하고 좌초되었다. 역사는 이들의 개혁이 돈좌된 이후 국가 시스템이 급격히 휘청거리다 몰락의 길을 걸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비극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정조의 행보는 정말로 조선의 시스템을 갈아엎은 '개혁'이었을까, 아니면 무너져가는 체제를 왕 개인의 역량으로 지탱한 '연명'이었을까?

 

 

우선 정조의 대표적인 업적이 개혁의 정의에 부합하는지 살펴보자.

  • 초계문신제&규장각

잘 뜯어보면 이것은 (빽이 별로 없는) 젊은 신진 관료들을 정조 본인이 재교육하여 일종의 왕당파를 만드는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다. 의도적으로 국왕의 친위세력을 육성시켜 기존의 귀족/관료세력을 견제하는 것은 군주들이 애용하던 전가의 보도이다. 결국 규장각은 정조 사후 용도가 변질되어, 소수 벌열 가문 자제들의 임관 통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흥선대원군 대에 와서 왕실 도서관의 기능으로 대폭 축소된다.

  • 수원성

정조는 수원성을 양위 후 은퇴하여 머물 곳으로 설계했는데, 단순히 은거용 성이 아니라 상업, 군사 요충 도시로 키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 체제를 바꿀 만한 사업이 아니었다는 데에 선을 그어야 한다. 정조 사후 수원은 한양을 방위하는 유수부라는 군사적 기능 외에는 도시가 크게 번성하지 못한 중견 고을 수준에서 머물렀다. 수원이 본격적으로 발전 가도에 올라탄 것은 박정희 정부 들어서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옮기고 나서부터이다.

  • 장용영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에 걸쳐 완성된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이라는 중앙군 체제가 건실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5군영은 단순한 국왕 호위 부대가 아니라, 도성 방어와 수도권 핵심 요충지를 분담하여 책임지는 국가 정규군 시스템이었다.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壯勇營)은 그 근본 성격이 국왕 직속 친위대였다. 정조 말년 기준 장용영은 한성의 내영과 수원의 외영을 합쳐 약 5,000명 규모로 불어났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재원이었다. 내탕금은 물론 경기도 일부 군현의 세수가 장용영 운영비로 직접 전용됐다. 국가 재정이 사실상 왕실 친위 조직을 먹여 살리는 구조였다. 5군영은 예산을 뜯기고 정예병을 차출당한 채 껍데기만 남았다. 비유하자면, 대통령 경호실을 군사조직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수도방위사단의 핵심 인력과 예산을 대거 빼내어 경호실에 배치한 것과 다름없다. 결국 장용영은 정조 사후 해체(1802) 되었다. 조선처럼 엄격히 유교적 예법을 중시하는 나라에서는 선왕의 제도를 함부로 뒤집어엎는 것은 불경죄로 터부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혁파되었다는 것은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정순왕후가 정조와 정치적 대립 관계여서 그랬다는 철지난 음모론은 이제 들어갈 때가 되었다.

  • 신해통공

첫째, 신해통공의 실질적 수혜자 문제다. 시전 독점이 깨진 자리를 채운 것은 이미 자본을 축적한 사상도고(私商都賈) 계층이었다. 육의전 중심의 독점이 해체됐지만 그 자리에 난전 상인들이 자유롭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 기존에 비공식적으로 자본을 축적해온 중간 상인층이 이득을 봤다. 독점의 주체가 바뀐 것이지 상업 구조의 근본이 바뀐 것이 아니다. 둘째, 당시 동아시아 맥락이다. 같은 시기 청나라는 광저우 13행(廣州十三行)을 통해 서구 상인들과 제한적이나마 교역하고 있었고,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와 교역 중이었다. 조선만 유일하게 대청·대일 루트 외 외부와의 교역 창구를 완전히 닫고 있었다. 신해통공이 아무리 국내 상업을 진흥했어도 이 구조 안에서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인간 정조와 계몽?

 

정조는 전형적인 도학 군주(道學君主)였다. 스스로 스승을 자처할 만큼 학문적 자부심이 강했으나, 그 지향점은 진보가 아닌 성리학적 근본주의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는 경전의 원전에 철저히 집착했고, 그 결과 당시 유행하던 자유로운 문체인 백화문(구어체 한문)이나 소설 문체를 '잡학'으로 규정하며 탄압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주도했다. 그 대표적 피해자가 북학파의 핵심 박지원이었다. 조선 최고의 산문으로 꼽히는 그의 『열하일기』가 문체 문제로 직접 지목됐고, 정조는 박지원에게 순정한 고문체로 반성문 격의 글을 지어 올리도록 명했다. 조선이 낳은 가장 창의적인 산문 작가를 문체 교정 대상으로 삼은 이 장면은, 정조의 '계몽'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는 사상의 자유를 확장하는 '계몽'이 아니라, 과거의 권위로 돌아가려는 '복고'였다. 세계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정치적, 제도적, 문화적으로 급변하는 와중, 정조는 오히려 성리학이라는 13세기의 후진기어를 넣고 전속력으로 밟은 셈이다. 흔히 정조가 실학이나 서학에 개방적이었다고 평가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시 실학(實學)은 성리학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방법론적 실용성을 찾던 지류에 불과했으며, 정조 역시 성리학적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이를 허용했다.

 

서학(천주교)에 대한 온건한 태도 역시 사상적 포용이라기보다 정치적 보신에 가까웠다. 1791년 발생한 진산 사건(윤지충의 신주 소각 사건) 등 천주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연루된 핵심 인물들은 정조가 초계문신제를 통해 공들여 키운 남인(南人) 계열 인사들이었다. 국왕의 친위 세력이 사교(邪敎)에 물들었다는 비판은 정조 자신의 인사 정책에 대한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었다. 제 팔을 스스로 자를 수 없었던 정조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적당히 덮어두는 길을 택했다. 결국 이러한 사상적 모순과 미봉책은 사후 천주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신유박해, 1801)로 폭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시스템 속에서의 정조

 
정조를 개혁군주로 보기 어려운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처해 있던 구조적 맥락에 있다.

 

조선의 붕당 정치가 건강하게 작동했던 시기, 즉 여당과 야당이 팽팽하게 공존했던 시기는 조선사 전체에서 생각보다 짧다. 정여립의 난 이전의 짧은 시기와 효종~현종 치세를 합쳐 도합 30년 남짓이다. 정여립의 난 이후 동인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 중심의 독점 체제가 굳어졌다. 이 구조 위에서 숙종은 네 차례의 환국(換局)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나, 그 부작용으로 정치는 여당이 바뀌면 야당을 조정에서 쓸어버리는 극단적 청산으로 변질되었다. 이 갈등이 경종 대 신임옥사로 폭발하고 영조 대 이인좌의 난이라는 홍역을 치른 뒤에야, 영조는 각 당파의 강경파를 쳐내고 온건파들만 남기는 탕평(완론 탕평)을 택했다. 그러나 탕평당은 본질적으로 '국왕만 바라보는 사람들로 조정이 구성된다'는 치명적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정조는 이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다. 붕당 정치의 역사를 길게 서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조의 준론 탕평(각 당파의 색깔을 유지하는 의미)은 영조가 만들어놓은 구조를 개선하려 한 시도였지만, 그 판의 기획·감독·연출을 오직 정조 혼자 감당해야 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한계가 내재해 있었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 후기 경화세족(京華世族) 현상이다. 서울 집중화가 심화되면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달성 서씨 등이 18세기 후반 이후 주요 요직을 사실상 윤번제로 나눠 가졌다. 지방 인재의 중앙 진출이 막힌 자리를 이 소수 가문들이 촘촘히 채우고 있었다. 호남은 정여립의 난으로, 영남은 이인좌의 난으로 낙인찍혔으며, 평안도와 함경도는 개국 직후부터 소외된 지 오래였다. 영조가 이 비대한 벌열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세력이 크지 않은 가문을 사돈 삼아 등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척신 정치의 서막이 된다.

 

탕평의 본질은 목적의 선함과 관계없이 국왕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짜가 아니다. 국왕이 신하들을 정력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측근 정치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조선 후기는 '왕이 똘똘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는' 구조를 스스로 만든 셈이다.

 

명태조 홍무제의 사례가 이와 겹친다. 그는 승상제(쉽게 말하면 각 부 장관이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구조)를 폐지하고 모든 실무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켜, 본인의 직접 결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홍무제 본인은 그럴 역량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후대 황제가 무능하거나 게으를 경우를 계산하지 못했다. 가정제·만력제·천계제 같은 맛이 간 황제들이 연거푸 등장하자 국가 시스템은 붕괴했다.

 

이 구조의 취약성은 정조 재위 말년에 이미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건강이 악화된 정조는 어찰을 통한 막후 정치로 끝까지 통제를 놓지 않으려 했다. 이 어찰 정치의 실상은 훗날 공개되면서 정조 독살설을 비롯한 노론 음모론의 상당 부분이 근거를 잃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정조는 어린 세자의 앞날을 위해 김조순을 후견인으로 지정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평생 경계했던 외척 정치의 빌미를 스스로 만들고 말았다.

 

총론

정조는 개혁군주가 아니다. 개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개혁 군주인가? 그보다 그를 조선 후기 정치적 모순의 극대점에 서 있었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조 사후 조선이 급속도로 타락한 것은 이 구조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군주가 갑자기 승하하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국왕 중심의 거대한 권력은 갈 곳을 잃고 붕 떴다. 순조는 부친만큼 권력 장악 의지가 강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 틈을 파고든 것이 정조가 직접 낙점했던 외척 안동 김씨였다. 정조가 만든 '왕권 중심의 시스템'이 왕의 부재와 동시에 '외척 중심의 독점 시스템'으로 전락한 비극이다. 정조는 분명 유능한 군주였다. 그러나 그의 유능함은 무너져가는 시스템을 본인의 역량으로 붙들어 맨 것이었지, 시스템 자체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유능함으로 떠받쳐진 체제는 그 인간의 수명만큼만 산다.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연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