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혀둔다. 나는 건축철학 전공자도 들뢰즈 연구자도 아니다. 집에 있던 책을 호기심에 집어든 일반 독자다. 그러니 들뢰즈 철학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처지가 못 된다. 나는 오직 두 가지 기준으로 이 책을 평가한다 — 구성과 가독성.
나쁜 책을 읽는 일은 일종의 고행이다. 홍익대 장용순 교수의 《공간의 위상학》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철학서 중 최악이었다. 어려워서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 어려운 철학서라면 칸트도 있고 헤겔, 니체 등 많다. 이 책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저자는 파리 8대학에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은 건축가이며 건축철학자다. 책 뒤에는 로잔공대 자끄 뤼캉(라캉 아니다. 뤼캉 맞다) 교수의 추천사가 붙어 있다. 심사위원이 피심사자의 출판에 추천사를 쓰는 것은 학계의 오랜 관행이다. 그말인즉슨 이 글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괜히 외국인 교수가 칭찬했다고 우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저자가 밝히듯 이 책은 저자의 박사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총 4권의 시리즈로 기획한 것 중 첫째 권이다. 박사논문 한 편이 네 권으로 불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책의 체질을 암시한다 — 덜어내는 것에 인색한 저자라는 것을. 보통 연구자들이 박사논문을 출간할 때, 핵심 논지를 압축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다.
철학서가 난해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칸트와 헤겔, 후설, 하이데거는 만연체로 악명 높고, 베르그손도 난해한 축에 들며, 비트겐슈타인은 단편적 명제 형식 때문에 전체 윤곽을 잡기가 까다롭다. 그러나 이들을 위해 변명하자면, 이전에 없던 개념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글이 복잡해지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최근 영미권과 유럽 대륙 양쪽 모두 명료한 글쓰기를 권장하는 추세인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들뢰즈, 데리다, 보드리야르로 대표되는 후기구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철학적 글쓰기에 일종의 독을 풀었다. 간단히 말해도 될 것을 난해하게 배배 꼬고, 수학과 과학 개념을 맥락 없이 차용하며, 일상어의 스펠링을 살짝 비틀어 전문 용어로 둔갑시킨다.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 독자는 저자의 사유에 닿기도 전에 용어의 미로에서 탈진한다. 이들이 비논리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언어의 사회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공통의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상어를 해체하고 비틀어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은어로 뒤바꿔버린다.
이것이 단순한 독자의 불평이 아니라는 점은 물리학자 앨런 소칼(Alan Sokal)과 장 브리크몽(Jean Bricmont)이 증명했다. 이들은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1997)에서 들뢰즈, 라캉, 보드리야르 등이 수학과 물리학 개념을 얼마나 무책임하게 차용하는지를 원문 인용과 함께 실증적으로 해부했다. 더불어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판됐을 때 프랑스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균열이었다는 뜻이다.
장 교수의 책은 이 후기구조주의적 글쓰기의 병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볼드체로 표시된 수많은 용어와 마주한다. 한 챕터에 족히 열 개가 넘는다. 이 용어들은 일상어처럼 생겼지만 들뢰즈식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를 달고 있다. 제목에 '철학적 모험'이라 써놓고는 정작 독자에게 모험 이전에 암호 해독을 요구하는 셈이다. 이 책은 들뢰즈 철학 해설서가 아니다. 들뢰즈를 현대건축에 접목하려는 시도다. 그렇다면 더더욱 의문이 남는다. 접목(Grafting)이란 서로 다른 두 개체가 만나 새로운 생명력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키는 포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들뢰즈의 용어를 건축의 맥락으로 번역해 녹여내는 대신, 원전의 용어를 거의 그대로 복제해 건축 위에 덧씌웠다. 이는 접목이 아니라 단순한 라벨링에 가깝다. 진정한 접목은 들뢰즈의 용어를 쓰지 않고도 그 사유가 어떻게 건축물의 벽과 바닥에 녹아 있는지를 증명하는 데 있다.
구성의 문제는 여기서 기인한다. 이 책의 제목은 <공간의 위상학> 인데 정작 건축에서의 위상학은 마지막 6장에 가서야 등장한다. 건축이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할 책에서, 건축은 들뢰즈 철학의 긴 우회로 끝에 겨우 도착하는 목적지가 되어버렸다. 짐작컨대, 박사논문을 4권으로 늘리는 과정에서 구조주의 철학의 계보와 들뢰즈 용어 해설 등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건축을 위한 책에 철학 교재가 끼어들었고, 구성이 복잡하게 되어 버렸다.
왜 독자가 건축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들뢰즈부터 학습하고 넘어가야 하는가? 망치를 쓰기 위해 대장간의 역사와 쇠의 성질을 마스터해야 한다면 그건 연장이 아니라 상전이다. 목차만 훑어봐도 알 수 있다. 다이어그램, 리좀, 접기, 미분적 구조 — 전부 들뢰즈의 언어다. 특히 5장은 결정적이다. 미분의 역사부터 미분적 구조, 애매-판명, 선험적 경험론까지 — 저자가 독자를 위해 배경 설명을 친절하게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구성이 독자에게 실제로 현대건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답은 NO다. 이 책에서 들뢰즈의 용어를 전부 걷어내도 현대건축에 담긴 철학적 함의를 이해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저자가 직접 첨부한 건축 사례들만으로 설명이 충분히 된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 책에서 무엇인가 — 장식이다.
여기서 내가 명료함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히 읽기 편해서가 아니다. 어려운 내용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저자의 진짜 실력이며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언어가 투명해야 비로소 독자의 비판적 사고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투명하지 않은 언어 뒤에 숨는 것은 지적 깊이가 아니라, 소통에 대한 직무유기다.
건축철학에 기대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공간이 어떻게 사유되어 왔는지, 건축가들이 어떤 언어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해 왔는지를 독자가 따라갈 수 있게 안내하는 것이다. 철학 개념은 그 안내를 돕는 도구여야지, 안내 자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들뢰즈가 현대건축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사상가라면,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들뢰즈의 언어를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언어로 번역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철학서는 독자를 사유로 초대한다. 이 책은 독자를 문밖에 세워둔다. 호기심에라도 집어들었다면 도로 꽂아두길 권한다.
미학이나 철학 전공자한테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인용하면 들뢰즈를 또 인용해야 하는 액자의 액자 구조가 될 것이다.
c.f. 이 책의 철학적 그리고 형식적으로 완벽한 대척점이라면 르꼬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나 피터 줌터(Peter Zumthor)의 Thinking Architecture(1998)가 있다.
c.c.f. 철학적 사유에 대해 친절하게 이끌어주는 책은 대표적으로 사이먼 블랙번의 <생각(Think)> 이나 토머스 네이글의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What does it all mean?)>가 있다.
c.c.c.f. 프랑스 내에서도 꽤나 마이너하고 유별나기로 소문난 파리 8대학식의 철학이 한국에서는 어째서 현대 철학의 최전선인 양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유통되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저들을 최전선이라고 하면 프랑스 현대 지성사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바슐라르, 캉길렘, 부르디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아롱, 레비스트로스 등을 모욕하는 것이다.
c.c.c.c.f. 건축가가 들뢰즈가 어쩌니 라캉이 어쩌니 바디우가 어쩌니 하는 것보다, 그렇게 위대하신 들뢰즈의 사상을 작품으로 재현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건축철학> 아닐까. 프로필에 대표작이 없다면? 아이구야, 그것 참 유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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