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이전의 글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지금까지는 특정 저자의 논리적 결함(비약)이나 지적 사기를 발라내는 데 집중했다면, 오늘은 시장 전체의 생태계를 한번 짚어보자 한다.

동양철학
요즘 철학 시장의 유행가는 뻔해서 눈물이 나온다. 얼마 전까지 노자와 장자였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만든 서양철학의 이분법 (나와 타자,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 etc.)이 우리 영혼을 갈라치기와 탐욕으로 피폐하게 만들었다"며 동양의 '비움'과 '위 아 더 원'으로 몰려갔다. 그러다 그 유행이 시들해지나 싶더니 이번엔 쇼펜하우어와 니체다 (하필이면?). 아이돌이 추천하자 철학책이 베스트셀러 1위가 됐고, 한 해에만 관련 서적이 수십 종씩 쏟아졌다. 포장지만 동양에서 서양으로 바뀌었을 뿐, 내용물은 똑같다. "비우면 평온해진다"가 "욕망을 줄이면 평온해진다"로 번역됐을 뿐이다. 그들은 더 잘 요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배고픔을 잊게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칼 없는 주방은 주방이 아니라 그냥 창고다. 참으로 훌륭한 도피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사실 노장(老莊)의 근본은 개인의 수양이 아니라 군주를 위한 정치철학이다.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거리는 게으름이 아니라, 불필요한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일을 완벽하게 성취하는, 정치가에게 있어 극단적인 <효율>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 48장은 이것을 명료하게 못 박는다. 배움을 추구하면 날마다 더하지만 도를 추구하면 날마다 덜어낸다고. 더는 것이 아니라 덜어냄으로써 완성에 이른다는 이 원리는, 자기계발 시장이 파는 "내려놓음의 미학"과는 차원이 다른 통치의 언어다.
장자가 말한 '분별심을 버리라'는 말 역시, 멍청한 상대주의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별심은 선입견이다. 『장자』 제물론에서 장자는 천지가 나와 함께 생겨났고 만물이 나와 하나라고 했다. 이것은 경계를 없애 무감각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의 틀 바깥에서 사물을 보라는 요구다. 한마디로 장자는 내 좁은 식견을 버리고 사물의 실제 결(Texture)을 읽어내는 '초고해상도 인식'을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다.
결국 노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시장에 유통시키는 것이 씁쓸한 비극이다. 사짜들은 '무위'를 현실의 벽에 부딪힌 이들에게 건네주는 달콤한 마약으로 쓴다. 사바세계의 전쟁에서 상처입고 지친 사람들에게 "애쓰지 마라, 내려놓아라, 그것이 무위의 도다"라고 속삭이면 누가 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무기력을 향한 철학적 알리바이다. 실력 부족을 비움의 미학으로 포장해주고, 전략적 무능을 무위의 지혜라고 합리화한다. 칼을 갈아 다시 전장으로 나가는 고통 대신, 칼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정신승리를 판매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고통이 치유되는 듯 하겠지만, 책을 덮는 순간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 "당신은 원 오브 뎀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라고 청중에게 일갈하며 나와 나머지라는 이분법적 선택을 촉구하는 모 철학 교수가, 정작 책에서는 장자를 인용하며 모든 경계를 지우라 한다. 자기는 강의료와 인세를 1원 단위까지 분별해 챙기는 날카로운 포크와 나이프를 들면서, 독자에게는 도구 없이 손으로 뜯어먹으라는 꼴이다.
서양철학
서양 철학이 소비되는 형식도 마찬가지다. 요즘 힐링의 대명사가 된 쇼펜하우어의 진짜 엑기스는 우리가 세계라고 믿는 것은 '나의 표상(내 눈에 낀 안경으로 보는 세상)'이고 그 뒤에 있는 '맹목적 의지(생존 본능)'를 보라는 폭로에 있다. 쉽게 말해, 내가 마주하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 인식의 틀이 만들어낸 왜곡된 풍경일 뿐이며, 그 틀을 조종하는 것은 욕망, 즉 생존 본능이라는 뜻이다. 쇼펜하우어는 감성적인 멘트를 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정한 세계를 보는 데 방해하며 고통의 원인이 되는 생존 본능을 직시하고, <안경>에 낀 때를 손으로 직접 닦으라고 말한다. 이건 염세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에 가깝다. 그런데 이 서슬 퍼런 지침서를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운운하며 명상 앱이나 필사책을 파는 자들을 보면, 그 상술의 뻔뻔함에 경탄이 절로 나온다.
독자에게 필사책을 파는 장면은 코미디 중 단연 압권이다. "자기표현이 안 되는 공부는 끊어라"고 단언하는 바로 그 저자가, 다른 책에선 성인(본인 자신도 은근슬쩍)의 문장을 한 줄 한 줄 따라 쓰라고 손을 이끈다. 아무거나 쓴다고 뭔가 이해를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읽으려면 칸트의 인식론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넘어야 하고 — 쇼펜하우어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칸트의 현상과 물자체 구분을 직접 계승한다. 칸트 없이는 표상이 무엇인지, 의지가 물자체와 어떤 관계인지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다 — , 니체를 이해하려면 서구 2천 년의 도덕 체계를 뿌리째 뽑아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앞뒤 맥락 다 자른 예쁜 문장 몇 줄 베껴 쓴다고 삶이 바뀐다? 그건 생고기를 씹지도 않고 삼킨 뒤 영양분이 흡수되길 기다리는 꼴이다. 오히려 위장만 버릴 뿐이다.
읽기와 쓰기의 인지적 차이는 분명하다. 타인의 문장을 손으로 옮기는 행위는 기억 보조 수단일 뿐, 개념의 내면화나 사고의 재구성과는 다른 과정이다. 레시피를 백 번 베껴 쓰는 것과 요리를 잘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결국 그들이 파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남의 레시피(사실 짜깁기한 레시피지만)를 베껴 쓰며 얻는 '가짜 포만감'이라는 굿즈(Goods)다. (덕분에 만년필 펜샵은 살판났나 보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오니 비우라"고 말하는 동양철학 팔이들의 식단을 보자. 정말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왜 프리미엄 명상 앱 구독권과 고가의 힐링 강연을 후식으로 끼워 파나 모르겠다. 돈에 대한 집착이 참으로 눈물겹기 그지없다. EBS 명강의가 책이 되고, 책이 강연 패키지가 되고, 강연 패키지가 유료 온라인 클래스가 된다.
서양 철학 쪽도 구조는 동일하다. 아이돌 한 명이 쇼펜하우어를 추천하자 관련 서적이 불과 1년 만에 수십 종 쏟아졌고, 유튜브 철학 채널들은 "니체가 당신의 불안을 해소해줄 것"이라는 썸네일로 조회수를 쌓는다. 동양 힐링이든 서양 힐링이든, 코스 요리처럼 단계마다 계산서가 나오는 구조는 같다. "분별심을 버리라"는 말이나 "욕망을 줄이면 평온해진다"는 말이나, 결국 "이 식재료의 원산지를 따지지 말고 그냥 삼키라"는 지적 가스라이팅의 동의어다. 자기는 그 덕에 배를 불리면서, 독자 앞에는 "비움의 미학"이라 이름 붙인 빈 그릇을 내미는 것이다.
결론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건 이 'C(Choice)'가 갖는 비정함이다. 요리에서 손질이란 쓸 부위와 버릴 부위를 갈라내는 행위다. 투자의 세계든 생업의 현장이든, 선택은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를 버리는 이분법적 결단이다. 그러니 기회 비용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비움이다", "칼같은 분별을 거두고 세상을 보라"는 식의 물타기는 결국 쓸 것도 버릴 것도 구분 못 한 채 재료를 통째로 썩히는 것이다. 계좌를 녹이고 인생을 정체시킨다. 물론 칼을 안 드는 것도 선택이다, 굶어야 하겠지만.
도피처가 동쪽이든 서쪽이든, 도피는 도피다. 노자 필사책을 사던 손이 쇼펜하우어 필사책을 사고, 장자 강의를 듣던 귀가 니체 유튜브를 듣는다. 식재료만 바뀌었을 뿐 칼을 쥐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학위를 줄줄이 읊으며 자신의 학문적 경계를 칼같이 지키는 이들이 강의실 밖에서는 "경계를 허물라"고 외치고, 조회수와 인세를 1원 단위까지 분별해 챙기는 이들이 독자에게는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0과 1의 이분법이 만든 디지털 문명의 수혜는 누구보다 앞장서 누리면서, 입으로는 문명의 타락을 비난하는 위선은 이제 지겨울 때가 됐다. 덕분에 오늘도 한국의 인문학은 서서히 말라 죽어간다. 이미 죽었을 수도.
철학을 팔면서 자본주의를 욕하는 이들이 정작 자본주의의 가장 충실한 수혜자라는 사실은, 그들의 논리보다 그들의 통장이 더 솔직하게 말해준다. 사짜와 얼치기 철학자들을 가장 잘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이 무엇을 설파하는지가 아니라 그들과 자본주의의 동맹관계를 뜯어보는 것이다.
c.f. 철학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가? 일반인이 굳이 원전까지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해당 철학자를 전공한 사람이 쓴 해설서면 무난하다.
c.c.f. 뻔한 소리지만 철학책은 현실의 모순됨에 대해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도구이다. 현실 문제에 고민한다면 사회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의 책, 또는 이코노미스트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같은 좋은 잡지를 사서 읽는 것이 생존에 유익하다고 본다.
c.c.c.f. 주인장은 어느 정도 내공이 생긴 후 니체를 읽으려 한다. 그의 격정적이고 강렬한 문체는 사람들을 끌어모으지만 서양 윤리학의 역사를 다 꿰고 있어야 하고, 행간을 읽는 것을 요구하기에 오독의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c.c.c.c.f. 아주 웃긴 책을 봤다. 살다살다 자기가 한 말을 필사하라는 철학자는 처음 본다.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다. 최진석의 <철학자의 공책>이라는 책인데, 22 500원씩이나 받아먹는다. <일러두기>가 기가 막혀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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