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를 설명하는 데 굳이 거창한 정치철학자들을 꺼낼 필요는 없다.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념으로 접근하는 순간 이념의 언어를 써야 하기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의 늪에 필연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글은 국가를 초월하는 극우 집단의 패턴에 주목한다.
첫째, 그들은 비겁하다. 극우는 절대 자기보다 강한 집단을 건드리지 않는다. 언제나 만만한 쪽을 찾는다. 희생양 선정에 있어서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신중한 셈이다. 권력자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극우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의 분노는 항상 아래를 향한다.
둘째, 그들은 배설만 한다. 사회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따위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다. 희생양 하나를 처리하고 나면 다음 희생양을 물색한다. 그렇게 폭주하다 결국 외부의 개입으로 제압된다.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준 수순이다. 건설은 없고 파괴만 있다.
셋째, 순혈주의. 집단의 우월함이 어느 순간 순수함으로 둔갑한다. 그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세뇌가 동원된다. 내부의 균열을 봉합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진화론까지 얹히면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넷째, 약자에 대한 연민이 없다. 앞의 순혈주의와 이어지는 이야기다. 약자는 집단의 순수함을 희석시키는 존재, 즉 제거 대상일 뿐이다. 동정은 순수함을 오염시키는 감정으로 취급된다. 강함을 숭배하는 자들이 약함을 혐오하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다섯째, 극우적 사고방식은 인지적으로 게으르다. 희생양 탐색은 문제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쉽다. 문제가 있다. A가 원인이다. 원인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삼단논법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복잡한 구조 분석보다 명확한 적이 훨씬 위안이 되니까.
그런데 이 인지적 게으름이 오늘날 유독 강력하게 작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알고리즘이다. 플랫폼은 분노를 먹고 자란다. 단순한 적대 구도를 담은 콘텐츠일수록 클릭을 유발하고, 플랫폼은 그것을 증폭시킨다. 복잡한 구조 분석은 읽히지 않는다. 명확한 적을 지목하는 콘텐츠는 퍼진다. 극우적 사고방식은 디지털 환경에서 구조적으로 유리하다. 비판적 사고 훈련이 부재한 사회에서 이 도식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문제인가.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꺼지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보라. 1차대전 패전의 원인을 군사적 실패에서 찾는 것은 너무 복잡한 일이었다. 훨씬 쉬운 답이 있었다. 유대인,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전쟁을 망쳤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명쾌하고 틀렸다. 그 거짓말이 민주주의를 14년 만에 끝장냈다.
대서양 건너편도 다르지 않았다. 19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즘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가 표현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데 동원된 것이다. 수천 명이 증거도 없이 직장을 잃었고, 공개 토론은 불신과 의심의 분위기 속에 얼어붙었다. 민주주의가 자기 무기로 자기를 찌른 셈이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1994년 르완다다.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부르는 라디오 방송이 100일 동안 100만 명을 죽였다. 학살의 도구는 총이 아니라 언어였다. 희생양 담론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세 사례의 공통점이 있다. 극우는 내부에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이다. 희생양을 하나 소비하면 다음을 찾는다. 스스로 멈추는 법이 없다. 멈추는 것은 언제나 외부의 개입이었다. 그리고 그 개입이 올 때쯤이면 이미 너무 늦은 경우가 많았다.
역설은 여기에 있다. 표현의 자유가 극우를 키운다. 모든 목소리를 허용하는 체제가 그 체제를 부정하는 목소리에 의해 잠식된다. 극우는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무대 위에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갉아먹는다. 기생이 아니다. 숙주를 천천히 죽이는 것이다.
이 역설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면으로 싸우면 되지 않느냐. 그들의 모순을 낱낱이 까발리면 되지 않느냐. 뻘게져서 열변을 토하는 쪽이 관중 눈에는 패자로 보이는 법이다. 그들은 반칙을 전략으로 쓴다. 우리가 규칙을 지키는 동안 그들은 규칙을 비웃는다. 같은 링에서 페어플레이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러면 낙인 찍지 말고 대화하면 되지 않느냐. 정당한 불만을 극우로 모는 건 폭력 아니냐. 글은 불만을 극우로 모는 게 아니다. 패턴을 진단하는 것이다. 비겁함, 배설, 순혈주의, 약자 혐오, 게으른 사고방식. 이 패턴에 해당하지 않으면 극우가 아니다. 해당한다면 낙인이 아니라 진단이다.
팩트로 조용히 논파하면 되지 않느냐. 이것도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팩트가 신념을 단기적으로 교정하는 효과는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빠르게 소멸한다. 오늘 설득해도 내일 알고리즘이 되돌려 놓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확증 편향이다.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반박하는 정보는 걸러낸다. 팩트의 질이 문제가 아니다. 팩트를 처리하는 인지 구조가 이미 닫혀 있는 것이다. 진영이 다르면 팩트도 음모가 된다.
그러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자는 말이냐. 제한을 주장한 적 없다. 표현의 자유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잠식하는 구조를 지적한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검열을 주장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자는 말이냐. 대중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다. 극우는 공백을 먹고 자란다. 불안이 채워질 공간이 없을 때 희생양 서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1924년 독일에서 경기가 회복되자 나치당은 군소 정당으로 쪼그라들었다. 공백을 다른 무언가가 먼저 채우면 된다. 문제를 회피하는 게 아니다. 불안의 원천을 해소하는 것이 희생양 서사의 토양을 없애는 더 근본적인 접근이다. 물론 그 공백을 채우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건 안다. 그게 2편에서 할 이야기다.
2026.06.27 - [Society] - 극우란 무엇인가 2: 자기모순의 집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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