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7 - [Society] - 극우란 무엇인가: 이념이 아닌 행동으로 접근하기
극우란 무엇인가: 이념이 아닌 행동으로 접근하기
극우를 설명하는 데 굳이 거창한 정치철학자들을 꺼낼 필요는 없다.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념으로 접근하는 순간 이념의 언어를 써야 하기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의 늪에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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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쓰인다. 한국전쟁 전후에나 어울릴 법한 어휘가 멀쩡히 살아있다. 빨갱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싸우는 빨갱이가 정확히 누구인지. 답이 돌아오는 경우를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적의 윤곽이 흐릿할수록 더 편리한 법이니까.
중국인 혐오는 나치의 유대인 혐오와 구조가 다르지 않다. 장애인 지하철 시위에 쏟아지는 분노는 약자를 향한 것이고, 이주노동자 임금 문제에 반발하는 목소리는 자기보다 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향한 것이다.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반에 퍼진 징조다.
1편에서 극우의 패턴을 다뤘다. 비겁함, 배설, 순혈주의, 약자 혐오, 인지적 게으름. 한국 사회에서 목격되는 것들이 이 패턴과 얼마나 정확하게 겹치는지 확인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불안이 먼저다
한국 사회의 극우화 징조를 이해하려면 기저에 자리잡은 불안감부터 봐야 한다. 자산소득과 노동소득의 격차는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 부는 세습되고 노동시장은 양극화됐다. 교육에 올인해도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좁아졌다. 파이가 줄어드는 경험이 반복된다. 아니, 정확하게는 파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내 몫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이 반복된다. 이 느낌이 핵심이다.
불안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원인을 찾는다. 여기서 두 갈래 길이 있다. 구조를 분석하는 것과 희생양을 찾는 것. 전자는 어렵고 후자는 쉽다. 1편에서 말했듯 극우적 사고방식은 게으르다. 문제가 있다. 원인이 있다. 원인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삼단논법은 불안한 사람에게 즉각적인 위안을 준다.
한 가지 오해를 미리 차단하겠다. 불안하면 혐오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불안한 개인은 얼마든지 다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다. 불안한 사회에는 그 불안을 먹이로 삼는 서사가 반드시 등장한다. 복잡한 구조 분석 대신 단순한 적을 제시하는 서사. 네 삶이 힘든 것은 저 집단 때문이라는 서사. 이 서사가 먼저 손을 내밀 때 전환이 일어난다. 불안 자체가 혐오를 만드는 게 아니라 불안을 겨냥한 서사가 혐오를 만드는 것이다.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구조적 문제를 공론화할 수도 있다. 연대를 조직할 수도 있다. 제도를 바꾸려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약자를 향해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이 선택지들 중 가장 비열한 것이다. 자기보다 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핑계로 삼는다 해도 비겁함은 비겁함이다. 희생양을 하나 제거해도 불안의 구조는 그대로다. 다음 희생양이 필요해진다. 폭주는 계속된다. 피해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 고스란히 받는다.
구조를 향한 분노는 비용이 크다. 기득권을 건드리는 일은 위험하고 결과가 불확실하다. 반면 약자를 향한 분노는 안전하고 쉽고 동료들의 환호까지 받는다. 1편에서 다룬 비겁함의 패턴이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원칙인가, 감정인가
그들의 주장을 가만히 들어보면 묘한 점이 있다.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원칙에서 나온 주장이라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일관성이 없다면 원칙이 아니라 감정이다.
반공을 외친다. 공산주의는 싫다고 한다. 그런데 강력한 지도자, 질서, 복종을 원한다. 공산주의와 권위주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지. 싫어하는 것이 공산주의인지 아니면 자기가 그 강력한 지도자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인지 헷갈린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계엄을 지지한다. 자유와 계엄이 한 문장 안에 공존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사람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는 하는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자신들만의 자유인지도 모른다.
국가가 복지를 확충하면 빨갱이니 배급견이니 조롱한다. 그런데 국가가 아무것도 안 하면 왜 국민을 방치하냐고 욕한다. 국가 개입이 싫은 건지 자기한테 안 오는 게 싫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자주 가져오는, 사회복지를 확대하면 국가 부채가 늘어난다는 프로파간다도 마찬가지다. 빚도 갚을 능력이 있으면 나쁜 게 아니다. 서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은 GDP 대비 100퍼센트가 넘는 부채를 안고도 굴러간다. GDP 대비 46퍼센트인 한국이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는 것은 공포가 현실보다 앞서 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한국의 높은 민간 부채율이야말로 국가가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펴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교육비, 의료비, 노후 준비 등 원래 공공이 담당해야 할 것들을 개인이 사비로 충당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세계 최고 수준의 민간부채다. 국가 부채를 아끼려다 민간 부채를 키운 것이다. 앞뒤가 바뀌었다.
애국을 외친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애국이 묘하게 작동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느 순간 나라를 오염시키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로 변환된다. 순혈주의적 애국심의 작동 방식이 그렇다. 내부의 순수함을 지키려면 외부의 오염원을 차단해야 한다. 그 오염원이 외국인이다. 그런데 외국인이 균질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강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위협이 된다. 약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오염원이 된다. 그러니 혐오의 방향이 국력을 따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편에서 말한 순혈주의와 비겁함이 여기서 다시 만난다. 중국인은 잠재적 범죄자고 동남아인은 불법체류 예비군이다. 그런데 미국인, 캐나다인, 유럽인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순수함을 지킨다는 자들이 정작 누구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지 보면 그 순수함이 얼마나 선택적이고 위선적인지 안다.
한국은 인종차별 없는 나라라고들 한다. 그 말을 믿고 싶다. 그런데 공공장소에서 외국인 혐오 구호가 이렇게 버젓이 외쳐지는 나라를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인종차별을 인종차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노골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사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의 민낯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을 하나로 모으면 무엇이 남는가.
반공을 외치지만 권위주의를 동경한다. 자유를 외치지만 계엄을 지지한다. 애국을 외치지만 혐오의 방향은 국력을 따른다. 나열하고 보니 공통점이 보인다. 모든 구호가 방패다. 원칙이 아니라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다. 신념이 먼저 있고 구호가 나온 게 아니다. 감정이 먼저 있고 그 감정을 포장할 구호를 나중에 가져다 붙인 것이다. 순서가 거꾸로다.
사회가 무언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다, 미래가 불안하다, 부조리와 불공정에 분노한다. 그런데 그 분노를 정당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은 어렵고 위험하다. 기득권을 건드리는 것은 비용이 크고 구조를 바꾸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구호를 빌린다. 반공, 자유, 애국. 이 단어들은 원래 무게가 있는 말들이다.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쌓인 무게다. 그 무게를 빌려 감정에 근거를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빌린 것은 빌린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니니 쓸 때마다 의미가 달라진다. 무게 있는 단어들이 이렇게 소비되는 것을 보면 언어가 불쌍해진다.
그러니 일관성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원칙이 없으니까. 있는 것은 불안과 분노와 질투뿐이다. 구호는 그것을 포장하는 포장지일 뿐이다. 포장지는 내용물에 따라 바뀐다. 오늘은 반공이고 내일은 애국이고 모레는 또 다른 무언가다. 그래서 그들의 적도 바뀐다. 빨갱이가 중국인이 되고 중국인이 이주노동자가 되고 이주노동자가 또 다른 누군가가 된다. 포장지만 바뀔 뿐 내용물은 같다. 1편에서 말한 배설의 패턴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그들의 주장은 원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불안과 분노와 질투에서 나온 것이다. 구호는 포장지고 혐오는 내용물이다. 그리고 그 내용물은 언제나 자기보다 약한 쪽을 향한다. 신념이 아니라 비겁함이다. 원칙이 아니라 계산이다.
정치권에 묻는다
진단은 여기까지다. 해법은 개인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구조의 문제는 구조로 풀어야 한다.
정치권에 묻겠다. 지금 이 사회에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희생양 서사 말고 다른 출구를 제시하고 있는가. 자산격차는 벌어지고 노동시장은 양극화되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좁아지는데, 그 불안을 정치가 흡수하지 못하면 극우적 서사가 흡수한다. 공백은 반드시 채워진다. 문제는 무엇이 채우느냐다.
첫째, 양극화 문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한국의 양극화는 노동소득으로는 자산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열심히 일해서 버는 돈보다 가만히 앉아서 불어나는 부동산 한 채의 가치가 더 크다. 이 구조가 고착되면 계층 이동은 불가능해진다. 계층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퍼지면 불안이 만성화된다. 만성화된 불안은 희생양을 찾는다. 악순환이다.
이 구조를 건드리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세제 개편이다. 불로소득에 매기는 세금과 상속세를 강화하는 것 (주인장은 절세 투자계좌까지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해서 번 돈과 가만히 앉아서 번 돈이 같은 세율로 취급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부가 세습되는 구조를 방치하면 출발선의 격차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벌어진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고착되는 것이다.
반론이 나올 것이다. 재산권 침해 아니냐. 이미 세금 낸 돈에 또 세금 매기는 이중과세 아니냐. 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씩 짚겠다. 재산권은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사회적 합의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토지는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사회 인프라, 공공 투자, 수십 년간의 집단적 노력이 만든 가치가 특정 개인의 자산으로 귀속되는 구조를 그냥 재산권으로 보호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중과세 논리도 마찬가지다. 상속세는 받는 사람 입장에서 새로 발생하는 소득에 대한 과세다. 노동자가 월급을 받을 때 소득세를 내듯, 상속을 받을 때 세금을 내는 것은 같은 원리다. 이중과세라는 프레임 자체가 상속을 소득이 아닌 당연한 권리로 전제하는 것이다.
자본 유출 우려를 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미 빠져나간 돈부터 잡는 것이다. 조세 피난처를 통한 역외 탈세는 이미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파나마 페이퍼스와 판도라 페이퍼스는 전 세계 자산가들이 어떻게 세금을 피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세율을 올리면 자본이 빠져나갈까 봐 걱정하면서 이미 빠져나간 자본에는 눈을 감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다. 역외 탈세 단속과 국제 조세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세제 개편의 전제 조건이다. 그것 없이 자본 유출을 이유로 세제 강화를 반대하는 것은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열어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 한 양극화는 심화된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한 불안은 만성화된다. 만성화된 불안은 계속 희생양을 찾는다. 세제 개편은 경제 정책이기 이전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문제다.
둘째, 조직문화의 문제다. 양극화가 거시적 불안을 만든다면 조직문화는 일상적 불안을 만든다. 매일 출근하는 곳에서 쌓이는 불안이다.
한국의 기업과 공공기관 조직문화는 여전히 후진적이다. 능력과 무관하게 연공서열로 줄을 세운다. 부당한 지시에 복종을 강요한다. 회의에서 상사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으로 취급된다. 내부 고발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응징당한다. 성과는 위로 올라가고 책임은 아래로 내려온다. 이 구조 안에서 매일을 보내는 사람이 불안과 분노를 쌓는 것은 당연하다.
그 분노가 퇴근 후 어디로 향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안다. 직장에서 억눌린 것을 더 약한 대상에게 푸는 것은 심리적으로 가장 쉬운 경로다. 상사에게 못 하는 말을 온라인에서 외국인에게, 장애인에게, 여성에게 쏟아낸다. 조직문화와 혐오 문화는 무관하지 않다.
한 가지를 덧붙이겠다. 젊은 세대는 흔히 이직을 즐긴다고 오해받는다. 실제로는 다르다. 한 군데에서 오래 일하고 싶어한다. 안정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진적인 조직문화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버티지 못하고 나오거나, 버티더라도 소진된 채로 남는다. 원하는 것과 현실의 괴리 자체가 불안이다. 잦은 이직을 강요하는 구조가 오히려 개인에게 불리하게 작동한다는 것도 문제다. 연금, 퇴직금, 경력 인정이 장기 근속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는데 조직문화가 장기 근속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제도와 현실이 따로 논다. 이 괴리를 방치하는 것은 불안을 구조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조직문화 개혁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불안을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정책이다. 수평적 의사소통, 내부 고발자 보호, 성과와 책임의 공정한 배분. 이것들이 제도로 정착되면 사람들이 직장에서 소진되는 방식이 달라진다. 소진되지 않은 사람은 희생양을 덜 찾는다.
셋째, 교육개혁이다. 양극화가 거시적 불안을 만들고 조직문화가 일상적 불안을 만든다면, 교육은 그 불안에 면역을 만들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육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중고교 교육의 대다수는 알맹이가 없다. 정답을 고르는 훈련만 있고 질문을 만드는 훈련은 없다. 대학도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반신불수 상태다.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 스펙을 쌓는 곳이 됐다. 취업을 위한 자격증 발급소로 전락한 대학에서 비판적 사고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영미권과 서유럽이 장문의 에세이와 구술시험을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논증을 글로 쓰고 말로 방어하는 훈련은 표현력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생각의 허점을 스스로 발견하는 훈련이다. 반론을 예상하고 처리하는 훈련이다. 불편한 질문 앞에서 도망가지 않는 훈련이다. 이 훈련이 쌓이면 단순한 희생양 서사가 손을 내밀 때 바로 잡아낼 수 있다. 저 논리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게 면역이다.
한국 교육은 이 훈련을 하지 않는다. 객관식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정답이 있고 고르면 된다. 단답형은 외우면 된다. 자기 논리를 세우고 방어하는 경험 없이 사회에 나오면 처음 만나는 설득력 있어 보이는 서사에 흡수되기 쉽다. 극우적 서사는 설득력 있어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1편에서 말한 인지적 게으름이 교육의 공백에서 자란다. 입시 제도를 손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을 왜 가르치는가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에서 질문을 만드는 교육으로. 정답을 고르는 훈련에서 논증을 세우는 훈련으로. 이 전환 없이는 불안한 사회에서 극우적 서사에 면역을 가진 시민을 만들어낼 수 없다. 다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말이 과격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구조를 유지하면서 극우적 사고방식의 확산을 막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극우적 서사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적을 지목한다. 제거하면 된다고 한다. 정치가 이 단순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불안의 원천을 실제로 건드리는 것이다. 말이 아니라 정책으로. 구호가 아니라 결과로.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극우를 비판해도 소용없다. 비판은 공백을 채우지 않는다.
세제 개편을 미루면 양극화는 심화된다. 조직문화를 방치하면 일상의 불안은 쌓인다. 교육을 바꾸지 않으면 희생양 서사에 면역이 없는 시민이 계속 만들어진다. 이 셋이 동시에 방치되는 한 공백은 계속 생긴다. 그리고 그 공백을 극우적 서사가 채운다.
1편에서 말했다. 극우는 공백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그 극우가 키워지면 민주주의가 자기 무기로 자기를 찌른다. 이미 목격한 일이다. 바이마르에서, 매카시즘에서, 르완다에서. 한국이 예외일 이유는 없다.
공백을 채우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그것을 방기하는 순간 다음 희생양이 정해진다. 빨갱이가 중국인이 되고 중국인이 이주노동자가 되고 이주노동자가 또 다른 누군가가 된다. 배설은 끝나지 않는다. 멈추는 것은 언제나 외부의 개입이었다. 그리고 그 개입이 올 때쯤이면 이미 너무 늦은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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