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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일베 문화=극우>는 반쪽짜리 진단

by pragma 2026. 7. 7.

세월호 유가족이 단식농성을 벌이던 광화문 광장 옆에서 피자를 시켜 먹던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 일간베스트(약칭 일베) 회원들이 처음으로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날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났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혐오와 조롱의 문화는 확산 중이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이 정치인의 묘소(누군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짐작하리라 생각한다)까지 찾아가 조롱의 흔적을 남긴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흔히 "극우의 부상"이라고 부른다.
 
물론 그렇게 부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한마디가 현상을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설명을 멈추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극우'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정체를 안다고 믿는다. 나치, 인종주의, 반이민. 익숙한 이미지가 떠오르고, 그만큼 익숙한 처방도 뒤따른다. 혐오표현 규제, 플랫폼 규제 같은 대책들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상은 그런 틀만으로 설명될까. 오히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숙고 자체를 조롱하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복잡한 사안을 복잡하게 다루려는 시도, 맥락을 따지고 근거를 검토하는 태도가 '씹선비질'이라는 한마디로 조롱받는 순간,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시민의 판단 능력은 서서히 침식된다.
 
그래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극우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퍼지고 있는 문화는 정말 그 범주 안에 들어가는가.


1. 극우에게는 강령이 있다

독일의 AfD, 프랑스의 RN, 이탈리아의 Fratelli d'Italia, 미국의 America First 진영.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정치 환경에서 자라난 이 넷은 그럼에도 공통된 골격을 공유한다. 이민 통제, 국가주권 회복, 전통 가족 가치, 경제 민족주의라는 네 축이다. 무엇을 얼마나 강조하느냐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대한 답을 문서로 갖고 있다.
 
AfD의 2025년 연방 선거강령("Zeit für Deutschland", 177쪽)은 이민, 가족, 경제, 외교 전반에 걸쳐 매우 구체적이다. 망명 신청 요건을 대폭 강화해 UN 난민협약·이주협약 탈퇴, 가족 재결합 종료, 국경에서의 구금센터 설치, 해상 구조자의 입국 거부와 즉각 송환을 명시했다. "재이주(Remigration)"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추방을 계획하며, 외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더 이상 출생만으로 독일 국적을 주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동시에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이뤄진 가족"을 사회의 세포로 규정하며, 신생아 2만 유로 축하금과 자녀 양육 급여 등 출산율 제고를 위한 재정 인센티브를 구체적 액수까지 제시한다. 유로존 탈퇴와 마르크화 부활,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며 석탄·원자력으로의 회귀도 강령에 포함되어 있다. 이건 감정적 언사의 나열이 아니라, 177쪽에 달하는 세부 정책의 체계다.
 
프랑스 RN의 공식 강령("한 가지 계획, 하나의 방법론")은 "보호의 의무", "도약의 필요", "계승의 책무"라는 세 축으로 짜여 있다. 이민 부문에서는 출생지주의(droit du sol) 폐지, 국가의료지원제도(AME)를 응급구호로만 축소, 가족 재결합 조건 강화, 그리고 솅겐 내 자유이동을 EU 시민에게만 허용하도록 유럽 파트너국과 재협상하겠다는 조항이 담겨 있다. 사회보장 혜택은 "국민 우선"을 원칙으로 프랑스 국적자에게 먼저 배분하고, 비기여형 복지 수급에는 5년 이상의 프랑스 내 근로 이력을 요건으로 건다. 동시에 출산율 제고를 위해 셋째 아이를 낳는 부부에게 무이자 대출을 보조금으로 전환해주고, 30세 미만 청년에게는 소득세와 법인세를 5년간 면제하는 등 세제 혜택을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원자력 발전 재건, 국부펀드 신설, 교육에서 기초 학력(과학·국어·역사)으로의 회귀까지 포함한, 20쪽이 넘는 세부 정책 문서다.
 
이탈리아 Fratelli d'Italia의 공식 강령("PER L'ITALIA")은 1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민 대응은 그중 하나(6번, "안전과 불법이민 대응")에 불과하다. 북아프리카 국가와 협력한 해상 봉쇄, EU가 관리하는 역외 이민 신청소 설치,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대응을 명시한다. 동시에 유럽·서구·아틀란틱 동맹의 일원으로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고 명시하고(반이민 강경파이면서 반러시아 강경파이기도 하다), 유대-기독교적 뿌리와 정체성을 유럽의 것으로 방어한다는 조항까지 있다. 출산율 제고를 위한 가족수당 인상과 가족 단위 과세(quoziente familiare)도 강령 5번 항목에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이건 인상 비평이 아니라 15개 항목, 수십 개 하위 조항으로 구성된 통치 청사진이다.
 
미국의 America First 진영도 마찬가지다. 미국 우선주의 정책연구소(AFPI)의 자체 강령은 국경장벽 완공, 인신매매 근절, 마약 카르텔 소탕, 이민 시스템 개혁, 대테러 역량 강화를 국경 안보의 핵심 과제로 명시한다. 좋든 싫든, 이건 "일단 화가 나서 지르는 말"의 모음이 아니라 집권을 준비하는 조직이 실제로 이행할 정책 패키지다.
 
정치학자 카스 무데는 극우의 핵심을 이민배척주의, 권위주의, 포퓰리즘 세 요소의 결합으로 정리했다. 그가 포퓰리즘을 "중심이 얇은 이념(thin-centered ideology)"이라 부른다는 점이 흥미롭다. 얇다는 건 허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홀로 서지 못하고 다른 이념에 올라타야만 작동한다는 뜻이다. 무데 스스로 이를 실어 나르는 다른 이념을 "숙주 이념(host ideology)"이라 부른다. 서구 극우에게 그 숙주는 대개 민족주의와 반이민 정서였다. 숙주가 무엇이든, 이들에게는 반드시 숙주가 있었다.
 
이 숙주를 다루는 솜씨도 시간이 갈수록 정교해졌다. 시앙스포 정치연구소가 프랑스 극우 정당의 경제 정책 991개 항목을 1986년부터 2026년까지 통계적으로 코드화해 추적한 연구를 보면, 이 정당은 창당 초기의 신자유주의에서 2011년 마린 르펜 취임 이후 재분배·사회보장을 앞세운 "사회적 포퓰리즘"으로, 다시 2017년부터는 기업가·고소득층을 겨냥한 우클릭으로, 그야말로 시기마다 다른 유권자층을 계산해 옷을 갈아입어 왔다. 대표는 2025년 프랑스 최대 경제인 단체 하계 세미나에 직접 참석해 재계와의 스킨십을 넓혔고, 정작 이민 정책에서는 강경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경제 노선만 선별적으로 손봤다. 연구는 이걸 "모든 유권자층을 잡으려는 전략"이라 부르는데, 확신에 찬 신념의 발로라기보다 지지 기반을 계산하고 설계하는 선거공학에 가깝다. 극우조차 이 정도로 스스로를 관리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사실 하나가 드러난다. 물론 개별 당원이나 지지자 한 명이 선을 넘는 일탈이야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하지만 제도권 극우 정당 차원에서 특정 참사의 희생자나 유가족을 조롱하는 걸 공식적인 정치 전략으로 채택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운데,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렇게 하는 순간 표를 깎아먹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지켜야 할 이념이 있고, 그 이념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반감을 사는 건 다른 무엇보다 정치적 손해로 직결된다. 그래서 이들의 조롱에는 늘 목적어가 붙는다 — 이민자를 조롱한다면 그건 이민 제한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향한 것이고, EU를 조롱한다면 주권 회복이라는 목표를 향한 것이다. 아무리 저열해 보여도, 서구 극우의 언어는 결국 무언가를 위해 복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2. 이 잣대를 한국에 대보면

먼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극우와 반지성주의는 같은 층위의 개념이 아니다. 극우는 정치 이념이고, 반지성주의는 문화적·인식론적 성향이다. 둘은 배타적이지 않다 — 극우도 반지성적일 수 있고, 좌파도, 중도도 반지성적일 수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확인하려는 건 "이게 극우냐 아니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극우라는 분류가 이 현상의 어디까지를 설명하고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못하는가다.
 
일베에서 파생된 조롱 문화를 이 잣대에 대보면, 곧 어긋나는 지점들이 드러난다. 여기서 다루는 대상은 "한국 우파" 전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정당정치 안에서 활동하는 보수 세력과는 별개로, 일베에서 파생되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이 특정한 조롱의 문법을 가리킨다.
 
적대의 방향이 다르다. 무데의 정의에서 극우의 적은 위(부패한 엘리트)와 밖(이민자)이다. 일베발 문화의 적은 대체로 아래 — 사회적 약자, 유가족, 특정 지역 출신 — 를 향한다. 2014년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은 일베 게시물 전수와 이용자 10명의 인터뷰를 통해 이 점을 분석한 바 있다. 이 논문은 일베를 파시즘이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극우주의의 틀로 곧바로 재단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좌파·호남·여성이라는 세 대상이 일베 이용자들에게 착취자나 위선자로 지목된다고 짚는다. 흥미로운 건 이 감정의 구조다 — 논문은 이걸 사회학자 뒤르켐이 말한 집단적 연대를 만들어내는 열광과 대비되는, 냉소에 의해 매개되는 열광으로 규정한다. 뜨거운 신념이 만든 연대가 아니라, 차가운 조소가 만든 결속이라는 뜻이다.
 
이 적대의 문법을 몇 년간 관찰한 한 사회비평가는 흥미로운 진단을 내놓는다. 소수자든 약자든 대상을 가리지 않고, 넷우익의 혐오 발언에는 일관되게 능력주의 논리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 혐오든 여성혐오 용어든, 능력주의라는 말을 직접 쓰지 않을 뿐 "무임승차"라는 표현으로 이미 그 논리를 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건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 절약 장치이기도 하다. 왜 특정 집단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는지, 그 역사적·구조적 원인이 무엇인지 따지는 대신, "노력한 자는 받고 안 한 자는 못 받는다"는 단 하나의 잣대로 모든 걸 정리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숙고를 생략하고 즉각적인 판단으로 건너뛰는 이 습관은, 뒤에서 살펴볼 반지성주의의 정의와 정확히 같은 자리에 있다. 그리고 이 능력주의적 도식은 뒤에서 다룰 "희화화"라는 형식과 상충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강화한다 — 무임승차자라는 단순한 악역이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그를 희화화하는 데는 아무런 배경지식도 숙고도 필요 없다. 내용의 게으름(능력주의적 단순 도식)과 형식의 가벼움(누군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경쟁)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건 무데식 포퓰리즘의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엘리트" 구도를 닮았지만, 화살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 향한다.
 
동기가 다르다. 같은 연구를 확장해 낸 단행본에서 저자는 이 문화를 다른 각도로도 설명하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단서 하나가 나온다. 웃길 수 있는 능력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구성된 경쟁 체제에서는 윤리적·도덕적 잣대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고, 이런 경쟁을 문제 삼는 사람은 "씹선비"로 낙인찍힌다는 것이다. 즉 이 문화의 본질은 정치가 아니라 웃음을 둘러싼 경쟁이고, 우파적 정치색은 그 경쟁을 정당화하는 사후적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떠받치는 세력 자체가 하나가 아니다. 개신교 근본주의 계열(전광훈류)은 반공·반동성애·친미라는 뚜렷한 이념을 갖고 있어, 넷 중 유일하게 무데의 정의에 근접한다. 그런데 정재영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보수 성향 개신교인 57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를 보면, 이들은 개신교 전체에서도 명백한 소수다. 스스로를 극우파라고 인식하는 응답자는 18.9%에 그쳤고, 군집분석상 "극우 성향"(행동형+이념형)으로 분류된 비율은 41%였다. 이 수치들을 종합해 연구자는 보수 신자 중 극우 성향 비율을 20~40%로, 개신교 전체 인구 기준으로는 약 10%로 추산했다. 압도적 다수(81.1%)는 스스로를 비극우파로 인식했다.
 
다만 이 수치가 "정치적 개신교"의 크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건 아니다. 한 매체가 2026년 상반기에 전국 "우파 성향" 교회 86곳의 설교 영상 1600여 편을 직접 분석한 결과, 이 중 상당수가 전광훈과 공식적으로 얽혀 있지 않으면서도 강단에서 반복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냈다. 절반이 넘는 교회에서 이재명이나 민주당이 최소 한 번은 언급됐고, 선거법 위반을 의식해 정당 이름 대신 "좌파"라는 말로 우회하는 경우도 늘고 있었다. 이걸 보도한 매체 스스로도 이들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면서도, "시끄럽고 조직화된 이 소수"가 한국 교회의 공적 이미지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고 짚는다. 즉 전광훈과의 공식 동맹은 소수지만, 강단에서의 정치적 발언 자체는 그보다 훨씬 넓은 네트워크에 걸쳐 있다는 뜻이다. 개신교 극우는 개신교를 대표하는 흐름이 아니지만, 그 언저리의 정치화는 통계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넓게 퍼져 있다.
 
시대착오성 자체가 반지성주의다. 이 조롱 문화의 노년층 계보를 떠받치는 반공주의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서구 극우의 반이민 정서는 좋든 싫든 현재의 이민 통계와 노동시장 데이터를 놓고 다투는, 갱신되는 정책 담론이다. 반면 한국의 이 반공주의는 냉전이 끝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갱신되지 않았다. 북한의 실제 정책 변화나 중국의 구체적 행보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빨갱이"·"종북"이라는 냉전기의 낱말을 대상이 누구든 반사적으로 가져다 붙이는 라벨링 기제로만 남았다. 이건 이념이라기보다 이념의 화석이다. 분석을 갱신하는 수고 대신 예전 단어를 재사용하는 이 습관 자체가, 정확히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말한 반지성주의의 작동 방식이다 — 낯선 현실을 마주하는 대신 익숙한 딱지를 반사적으로 꺼내 드는 것.
 
여기에 안티페미니즘을 앞세운 청년 남초 커뮤니티와 순수하게 재미를 좇는 조롱 문화까지 더하면 그림이 완성된다. 개신교 근본주의, 반공 노년층, 안티페미니즘 커뮤니티, 조롱 문화 — 이건 하나의 정치 세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계보·동기를 가진 원한들이 특정 정치적 국면(탄핵 정국 등)에서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친 것에 가깝다. 각 계보가 왜 하필 그 표적을 골랐는지에 대한 역사적 뿌리를 캐는 건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다만 분명한 건, 이들을 "극우"라는 단일 명사로 묶는 순간 오히려 실체를 놓친다는 사실이다.


3. 숙주를 갈아탄 반지성주의

그렇다면 이걸 뭐라 불러야 할까.
 
미국의 역사학자 호프스태터는 반지성주의를 미국 문화에 깊이 새겨진 하나의 반사작용으로 설명했다. 그는 이를 "삶의 정신적 측면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 그리고 그 가치를 끊임없이 깎아내리려는 성향"이라고 정의하며, 이 반사작용의 근원을 종교, 시민사회와 정치, 사업, 교육이라는 네 영역에 걸쳐 추적했다. 그의 논지에서 핵심은 개별 사례가 아니라 구조다. 반지성주의는 독자적인 이념이 아니라, 이 네 영역이라는 서로 다른 숙주를 갈아타며 존속하는 반사작용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는 추상적 정의로 끝나지 않는다. 각 영역마다 구체적인 역사가 있다. 1828년 대선에서 학자적 소양이 깊었던 존 퀸시 애덤스는 전문성 자체를 불신하는 앤드루 잭슨에게 패했는데, 당시 이 패배는 "귀족정과 불모의 지성" 대 "민주정과 토착적 직관"의 대결로 읽혔다. 종교에서는 부흥운동이 신학적 성찰보다 감정적 확신을 앞세운 설교자를 세웠는데, 대표적 인물인 드와이트 무디는 문법조차 서툰 수준이었지만 청중을 압도하는 확신으로 대형 강당을 채웠다. 사업에서는 자수성가 신화가 학력과 성공을 반비례 관계로 그렸다 — 대학에 거액을 기부하고 죽은 부자를 두고 "차라리 가난할 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되뇌는 어느 사업가의 말을 호프스태터는 인용한다. 이 자수성가 신화는 사실 능력주의의 원형이다. 부는 노력의 증거이고, 그 부를 대학(지성의 상징)에 나눠주는 건 낭비라는 논리다. 세 영역 모두에서 패턴은 같다. 전문성과 숙고가 아니라, 확신과 즉각성이 승리한다.
 
호프스태터는 지성(intellect)과 지적 능력(intelligence)을 구분한다. 지적 능력은 눈앞의 상황을 즉각 포착하고 판단하는 능력이고, 지성은 그 판단 자체를 다시 판단하는 능력이다. 위의 세 사례에서 승리한 쪽은 전부 전자였다 — 확신에 찬 즉각적 판단이었고, 패배한 쪽은 판단을 유보하고 검토하는 후자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호프스태터가 반지성주의 자체를 처음부터 "분노와 의심", "성향(disposition)"이라고 정의했다는 점이다. 신념 체계가 아니라 태도라는 것. 이 구분이 결정적이다 — 신념은 내용을 갖지만, 태도는 내용 없이도 작동한다.
 
이 틀을 가져오면 한국 사례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미국에서 반지성주의가 복음주의와 사업 실용주의(그리고 그 사업 실용주의에 담긴 초기적 능력주의)라는 숙주를 갈아타며 존속했다면, 일베에서 파생된 이 조롱 문화에서 그 숙주는 정치 강령이 아니라 주목경제 — 구체적으로는 대상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희화화 — 다.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이 "무엇이 웃긴가, 무엇이 반응을 이끌어내는가"라는 질문으로 통째로 대체된 것이다. 다만 그 형식(희화화)이 실어 나르는 내용까지 텅 빈 건 아니다. 앞서 살펴본 무임승차 서사가 정확히 그 내용을 채운다 — 능력주의라는, 숙고를 생략해도 되는 기성품 도덕관이다. 개신교 근본주의, 반공주의, 안티페미니즘은 각자 나름의 신념 체계를 갖고 있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 일상 속으로 퍼뜨리는 매개체는 결국 희화화이고, 그 희화화가 가장 즐겨 쓰는 재료는 능력주의가 미리 준비해 둔 악역이다.


4. 지킬 신념이 없는 자들

정리하면 이렇다. 일베에서 파생된 이 조롱 문화는 극우의 일부 요소(배제, 권위주의적 향수)를 포함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를 관통하는 진짜 문화적 기반은 반지성주의다. 그리고 이 반지성주의가 올라탄 숙주가 무엇이냐에서 서구와 결정적으로 갈린다. 서구 극우에서 반지성주의는 민족주의와 반이민이라는 숙주 위에 올라탄다 — 그래서 최소한 그 숙주가 요구하는 정치적 계산의 지배를 받는다. 반면 이 조롱 문화에서 반지성주의는 희화화, 즉 주목경제라는 숙주 위에 올라탔다. 지지층의 이탈이나 표의 손실을 걱정할 일이 마땅치 않은 숙주다 보니, 자제를 유도하는 압력도 그만큼 약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두 가지가 더 갈린다. 하나는 희화화가 어떤 정치적 목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최종 생산물이라는 점이다. 서구의 조롱에는 늘 목적어가 있었지만 이쪽의 희화화는 목적어를 지운 자리에 희화화 그 자체를 채워 넣는다고 할 수 있는데, 바꿔 말하면 이념이 조롱을 낳는 게 아니라 조롱이 이념을 소비하는 셈이다. 개신교 근본주의든 반공주의든 안티페미니즘이든, 그 신념들은 결국 희화화라는 상위 문법에 재료로 흡수될 뿐이다. 다른 하나는, 이건 애초에 하나의 정치 세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원한이 우연히 겹친 연합체라는 점이다. 협상 가능한 강령도, 자정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이게 퍼지는 방식이다. 특정 말투나 어미 하나에 고인을 향한 조롱의 함의가 실려, 그 맥락을 전혀 모르는 세대에게까지 놀이처럼 전파된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고인 모독성 말장난을 보면, 정작 그 말이 누구를 왜 조롱하는 것인지 모르는 채로 그저 웃기다는 이유만으로 따라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신념이 전수되는 게 아니라 반사작용이 전수되는 것이다. 사고 없이 학습되는 조롱의 문법이라는 점에서, 이건 뚜렷한 신념을 가진 극우보다 오히려 뿌리 뽑기 어렵다. 신념은 논박할 수 있지만, 반사작용은 논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이 조롱 문화는 정치를 말하지만, 정치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노동조차 하지 않는다. 서구 극우정당의 전략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독일의 AfD는 177쪽 분량의 강령에서 국적법과 가족정책, 통화정책까지 세부적으로 설계하고, 프랑스 RN 역시 유권자층을 의식한 경제·복지 공약을 지속적으로 조정해왔다. 정치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더라도, 이들은 집권을 전제로 정책을 조직하는 정당이다. 반면 한국의 이 조롱 문화는 처음부터 정당이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정책을 체계화하거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조직적 압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정치적 비전보다 조롱과 반응을 생산하는 능력이 더 큰 보상을 받는 구조였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강령보다 밈이, 정책보다 조롱이 중심에 남아 있다. 정당이라면 표를 얻어야 살아남고, 표를 얻으려면 유권자층을 계산해야 하고, 그 계산이 강령이라는 결과물로 남는다. 이쪽엔 그런 최소한의 규율조차 없다. 
 
자유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두텁게 보호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과정 자체가 더 나은 판단에 이르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 전제가 무너지면 표현은 토론이 아니라 공론장의 파괴로 귀결된다. 조롱이 토론을 대체하는 순간, 표현은 더 이상 의견 교환이 아니라 상대를 공론장에서 축출하는 도구가 된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을 견디는 체제이지, 의견을 검토하는 수고 자체를 포기하는 체제가 아니다.
 
서구의 제도권 극우가 나름의 신념을 정치적 목표로 조직한 세력이라면, 일베에서 파생된 이 조롱 문화는 신념보다 조롱 그 자체가 결속의 매개가 된 연합이라는 점에서 극우보다 수준이 낮다. 지킬 신념이 있는 자들과는 적어도 그 신념의 이름으로 협상하거나 논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