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고 끄적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연장'은 꽤나 중요하다. 물론 글만 쓴다면야 볼펜의 경제성을 따라갈 수 없겠지만, 만년필을 15년 가까이 써 와서 그런지 나는 이 도구가 훨씬 편하다. 여러 펜을 거치며 비로소 나만의 일관된 기준이 잡혔다.
첫째, 금촉은 의미 없다. 필감을 좌우하는 핵심은 팁의 연마 정도이지, 금이나 스틸 같은 재질 문제가 아니다. 스테인리스를 얇게 가공하면 잘 휘어지고, 금을 두껍게 가공하면 뻣뻣해지기 마련이다. 금촉이 부드럽다는 평가가 많은 이유는 고가 제품일수록 팁을 더 정성스럽게 연마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둘째, 무게는 20g대 (캡 안 꽂고). 너무 가벼우면 글씨체가 망가지고 너무 무거우면 손목이 아프다.
셋째, 락카칠은 피하자. 언젠가는 흉하게 벗겨진다.
넷째, 유지보수가 편한 카트리지/컨버터 양식. 독자 규격보다는 국제 규격을 선호한다. 특히 수입품 가격 거품이 심한 국내 환경에서 카트리지 전용 펜은 불리하다. 그렇다고 주사기로 잉크를 주입하는 건 귀찮다. 피스톤 필러 방식도 선호하지 않는데, 배럴에 금이 가면 끝장인데다 고무 부품의 경화로 인한 수명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도금은 아무래도 크로뮴 또는 백금 계열. 금도금 제품을 써 봤는데, 쉽게 벗겨져서 경악한 적이 있다. 크로뮴 또는 팔라듐 도금은 아직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파버카스텔의 온도로(Ondoro) 모델은 이 네 가지 기준에 가장 잘 부합한다. 기존에 사용해 본 같은 브랜드의 '룸(Loom)' 모델 스틸닙 품질이 발군이라, 동일한 닙을 쓰는 상위 기종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두 제품 모두 할인이나 단종 특가를 이용해 각각 10만 원 언저리에 구매했다. 가격 대비 만족도는 상당하다.
선택한 색상은 매트 블랙과 그레이 브라운 매트다. 싸구려 우레탄 코팅이 아니라 플라스틱 표면을 특수 가공한 형태다. 우드 버전이 더 인기가 많지만, 스틸닙에 20만 원 가까이 지불하고 싶지는 않아 제외했다. 최근 금값 인플레이션으로 만년필 가격이 전반적으로 인상되었는데, 금과 상관없는 스틸촉 모델까지 20만 원씩 받는 심보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나마 파버카스텔은 인상 폭이 미미해 졸지에 유럽산 브랜드 중 최상의 가성비를 자랑하게 되었다.

색감은 대충 저렇다. 일부러 사진에 효과를 넣지 않았다.
캡은 사진 찍기가 애매해서 서술로 대체하는데, 크로뮴 도금된 금속 재질이며 내부는 플라스틱으로 보강되어 있다. 만년필 사용자에게 중요한 '밀폐력(잉크 마름 방지)' 측면에서는 아주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캡을 닫아두더라도 최소 나흘~닷새 안에는 써주어야 한다.
카트리지/컨버터 방식이라 내부 구조는 단출하다. 배럴과 닙 파츠의 나사 섹션이 모두 금속 재질로 마감되어 있는데, 고급 펜에서나 볼 법한 완성도라 높게 평가할 만하다. (사족이지만 파버카스텔은 하위 라인업에도 컨버터를 기본 제공하는 훌륭한 서비스를 보여준다.)

그레이 브라운에는 M촉을 별도로 구매해 꽂았고(닙 파츠 전체가 나사로 분해결합이 된다. 가격도 유명 브랜드 치고 부담 없는 편이다), 블랙은 기본 F촉 그대로 사용 중이다. 닙 파츠가 나사식으로 탈착되어 교체가 용이하다. 요보(Jowo) 사 외주 제작 파츠의 전형적인 구조라 마음에 든다.
닙은 필감이 꽤 뻣뻣한 경성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사각거리는 소리가 남는다. 비슷한 성향의 워터맨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써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M촉은 전형적인 유럽 M촉다운 두께감을 보여준다. 코팅된 리갈패드나 옥스포드 노랑 노트, 아피카 노트에서는 번짐이 없지만, 일반 종이에서는 번짐을 감수해야 한다. 알파벳 위주로 필기하는 편이라 개인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 F촉은 종이 선택의 폭이 더 넓어 Double A 80g 용지에서도 잘 써진다. 본인은 노란색 리갈패드나 옥스포드 노랑종이 노트를 애용하는 편.


그립부 특유의 오목한 구조 때문에 그립감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나, 속기를 위해 펜촉 가까이를 잡는 내 필기 습관에는 문제없이 잘 맞았다.
눈에 띄는 단점은 다음과 같다.
- 지문 오염: 크롬 도금된 뚜껑에 지문이 잘 묻어난다.
- 품질 불균일: 블랙 제품의 경우 클립 결합이 헐거워 수리를 보냈다. 무상으로 캡을 교체받았으나, 이번에는 클립 중심축이 미세하게 비뚤어져 있다. 제조 공정의 균일도가 아쉽지만, 다시 컴플레인을 넣기 귀찮아 그냥 사용하고 있다. (보증서는 꼭 챙겨두어야 한다.)
총평
- 추천 대상: 크롬 도금의 지문 오염에 개의치 않는 사람, 필압이 센 편인 사람, 시가형 디자인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 쉬운 유지보수와 원활한 잉크 흐름을 원하는 사람, 손이 큰 사람.
- 비추천 대상: 크롬 도금 오염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클래식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사람, 두꺼운 몸체를 싫어하는 사람. 만년필 한달간 쓰지 않아도 잉크가 나와야 한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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